아버지께 불효자가 인사 올립니다. 얼마 전 동네 근처 산으로 나들이를 했더니 진달래가 피어 있더군요. 불현듯 당신 생각이 간절해졌습니다.벌써 40여 년 전 일이군요. 그 때도 진달래가 참 곱게 피었습니다. 당신은 볍씨를 담근다며 집안 이곳저곳을 뒤적이며 분주했지요. 농사꾼에게 볍씨 담그는 일처럼 소중한 게 있을까요. 모두가 굶주리던 시절, 당신은 볍씨만큼은 고이 보관했습니다. 그렇게 소중하게 보관해 온 볍씨 가운데 무거운 것을 골라 함지박에 넣어 소금물을 풀어 앉혀 푹 재웠습니다. 당신은 볍씨를 끔찍이도 소중히 여겼습니다. 저에게 "내일 죽더라도 씨오쟁이(씨앗보관통)는 베고 죽어라"고 당부하셨지요.
볍씨를 담그는 날은 정겹고 엄숙한 날이기도 했습니다. 볍씨를 함지박에서 꺼내 독에다 집어넣습니다. 독의 입구를 새끼줄로 두어 번 동여매고 부정타지 못하도록 창호지를 군데군데 구겨 넣습니다. 그리고 숯 검댕이 서너 개를 독에 넣어 둡니다. 볍씨를 신성한 대상으로 여긴 것이지요. 지금은 보기 어려운 광경이지요.
당신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우직하게 농사에 매달렸습니다. 나는 그런 당신이 싫었습니다. 아니 농촌 생활이 싫었고 도시 생활이 그리웠습니다. 읍내 전파사의 TV에 나오는 서울은 어찌 그리 신기하던지요. 당신이 못자리판을 만드는 날이면 저는 괜히 심술이 나서 당신 심부름을 듣지도 않고 딴청을 피웠지요.
그러다가 저는 어느 날 동네 기차역에 나가 서울 청량리행 열차에 충동적으로 몸을 실었습니다. 7남매의 장남이라는 책임감도 내팽개친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낯설고 물설은 서울로 흘러든 지가 어언 40년. 서울은 화려하지도 만만하지도 않았습니다. 서울의 화려한 겉모습의 이면에는 하루하루를 음울한 운명에 체념하며 연명하는 이웃들이 있더군요.
이제 저도 자식을 키우며 당신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아버지, 훌쩍 서울로 떠나 버린 자식이 얼마나 미웠던가요. 저는 당신의 임종도 지켜드리지 못했습니다. 불효 자식이 이제 가슴에 손을 얹고 용서를 구합니다. 아버지, 무엇이 그리 급하셔서 훌쩍 세상을 떠나셨나요. 이번 주말에는 진달래가 만개해 있을 당신의 묘소에 들르겠습니다. 아버지, 편안한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최성천·경북 포항시 항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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