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완의 세 번째 영화 ‘아라한_장풍 대작전’은 신인 감독 류승완이 흥행 감독 류승완으로 인정 받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관객의 반응이 어떨 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영화 자체가 그런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전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와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감독 류승완은 액션 영화의 종합선물 세트를 만들고 싶은 취향과 그 액션의 배경이 되는 밑바닥 인생을 가식 없이 바라보는 영화작가의 시선을 절충하는 재능을 보여줬다. 그 절충적 재능이 흥행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랬기 때문일까. ‘아라한…’에는 아예 작정하고 매끈한 흥행 대작을 만들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제작비와 마케팅 비용을 합쳐 60억원의 만만치 않은 돈을 들인 ‘아라한…’은 전편들의 핏기 서린 비장미를 말끔하게 제거했다. 마침내 주성치의 ‘소림축구’ 류의 황당무계한 판타지 액션과 성룡 영화의 어수룩하고 아기자기한 액션을 버무리는 가운데 다종다기한 장르 영화의 원전을 끌어와 자기식으로 ‘헤쳐 모여’를 시키는 잡탕 상상력이 훨씬 단순해졌다.
어리숙한 경찰 청년 상환이 도시에 숨어 지내는 무림 고수들의 간택을 받아 청년 고수 마루치로 다시 태어나며 절대악인 흑운과 한판 대결을 벌인다는 만화적 영웅담으로 구성돼 있는 것이다.
그게 나쁜 건 아니지만, 컴퓨터 그래픽 효과에 의존한 장풍 대결의 액션이 애초에 의도한 ‘도시 무협’의 기획을 갉아먹고 있는 것은 유감이다. 테헤란로와 광화문에서 ‘스파이더맨’ 흉내를 낸 것만으로 도시 무협 운운하는 것은 좀 낯간지럽다.
이 영화에 나오는 안성기를 비롯해 김영인, 백찬기, 김지영 등 쟁쟁한 배우들이 조역을 맡은 캐릭터 면면은 이 도시에 숨은 고수가, 그것도 2% 부족한 고수가 살고 있다는 흥미로운 통찰을 전해준다.
그들이 허름한 집구석에서 장풍을 날리고 공중 부양을 하는 초반 장면에서 류승완식 도시 무협 액션의 정체가 무엇인지 탄복하게 되고 그 전개를 기다리게 된다. 그러나 한국식 도시무협 액션영화의 기획은 곧 과도한 특수효과에 의존한 판타지로 넘어가고 애초에 설정된 그 쪽 드라마와 액션의 재미도 사라진다. 유일하게 변치 않는 것이 있다면 주인공 상환을 맡은 류승범의 매력이다.
이마무라 쇼헤이의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은 나이를 먹어도 변치 않는 노 감독의 희한한 상상력에 경의를 품게 만든다. 일생 동안 거의 인류학자와 같은 태도로 일본사회 속에 숨은 본능을 끄집어내는 데 탁월한 재능과 노력을 들인 쇼헤이 감독의 이 근작은 노골적인 육담의 세계와 비슷한 것에 다가선다.
성교할 때마다 몸에서 물이 나오는 여인을 알게 되면서 주인공 남자 요스케는 삶의 구원을 얻고 이윽고 그들이 사는 마을 전체가 활기를 얻는다. 늘 여인의 아랫도리에 열락이 있다고 여겨온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이지만 이 주책스런 이야기는 건강하고 심지어 경외스럽기까지 한 감정을 전해준다. 성에 도덕과 윤리와 정치가 개입하기 이전의 원초적인 세계, 인간이 동물과 등치되는 그 솔직한 세계에서 오히려 인간은 정직하고 깨끗해 보인다. 그 본능의 즉물적인 세계를 담백하게 바라보는 것은 연륜이 아니면 불가능한 경지일 것이다.
끝으로 ‘피아노’의 제인 캠피온 감독이 만든 신작 스릴러 ‘인 더 컷’은 상당한 명예를 얻은 감독이 여전히 전위적인 실험을 놓지 않는 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캠피온은 전형적인 스릴러 구성을 취한 이 영화에서 여인의 욕망과 혼란을 매우 화려하게 양식화한 화면으로 파고 들어간다. 뭐가 뭔지 제대로 잡히지 않는 구석도 있지만 정해진 답을 내놓지 않은 채 인간 심리의 심연으로 들어가려는 이 거대한 의지가 감탄스럽다.
김영진/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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