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영(63) 전남지사는 29일 오전 집을 나와 한강에 투신하기 전까지 내내 소화장애 및 구토 증세를 호소했다. 극도의 긴장감과 압박감, 스트레스를 느꼈을 때 나타나는 증세와 유사했다. 박 지사는 이날 낮 12시48분께 반포대교 위에서 운전기사 임모(63)씨에게 "머리가 어지럽다. 구토를 할 것 같다. 바람 좀 쐬게 잠깐 차를 세우라"고 말하고는 멈춘 승용차에서 내린 뒤 바로 난간을 넘어 한강으로 몸을 던졌다.
마지막 행적
박 지사는 오전 8시께 동부이촌동 자택을 나와 8시30분께 반포동 팔레스호텔에서 변호인, 전남도청 전·현직 간부 등과 만나 식사를 하며 수사대책 등을 상의했다. 박 지사는 당시 소화장애로 식사를 거의 하지 못했다. 박 지사는 낮 12시20분께 호텔을 나서다 헛구역질을 했고, 부인 이모(59)씨에게 전화를 걸어 "병원으로 가겠다"고 알린 뒤 반포대교 방향으로 향했다. 변호인인 권모변호사는 이때쯤 서울남부지검으로 전화를 걸어 "박 지사가 병원에 들렀다 출두하겠다"고 알렸다. 박 지사의 당초 출두예정 시각은 오전 11시 였다. 비서관은 박 지사보다 한발 앞서 동부이촌동 박 지사 자택으로 가 의료보험증을 갖고 나와 인근 K병원에서 접수를 마치고 박 지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운전기사 임씨는 경찰 조사에서 "박 지사는 평소와 다름 없는 모습이었고, 자살을 암시하는 듯한 말이나 태도는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부인 이씨도 "전날인 28일 밤 친구인 모 대학 교수 부부와 함께 집에서 모임을 가질 때까지도 남편의 표정은 밝고 좋았다"고 말했다.
왜 자살했나
검찰은 27, 28일 박 지사를 소환한 뒤 박 지사를 상대로 피의자 신문조서를 작성하는 등 비리 연루 혐의를 강도높게 추궁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검찰 관계자는 박 지사에 대한 영장 청구 여부를 묻는 질문에 "나름대로 준비한게 있다"며 사법처리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러나 박 지사는 주변 인사들과 변호인에게 "검찰 수사가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하면서도 혐의는 완강히 부인하며 결백을 주장해 왔다. 또 검찰 조사과정에서는 과거 건보공단 부하직원들의 진술내용을 보고나선 "이런 허위진술을 하다니 억울하다"며 배신감을 토로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오전 대책 모임에서 변호인이 "일부 혐의를 인정하고 선처를 받아보는게 어떠냐"고 제의하자 거부하기도 했다. 결국 부하직원들의 진술과 일부 물증을 토대로 검찰이 사법처리 가능성마저 내비치며 압박해오자 극단적 선택을 했을 것이라는게 박 지사 주변의 추정이다.
/안형영기자 ahnhy@hk.co.kr
■ 가족·주변 표정
"어떻게 이런 일이…."
박태영 전남지사가 투신 자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29일 가족들은 엄청난 충격과 슬픔에 빠졌다.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 자택에 있던 부인 이모(59)씨는 이날 오후 1시께 운전기사가 전화를 통해 투신 사실을 알리자 한동안 말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이씨는 "남편이 낮 12시가 조금 넘어 전화로 '속이 안 좋아 병원에 들렀다 돌아가겠다'고 했는데 도저히 믿을 수 없다"며 동서 등 친척 4∼5명과 함께 순천향병원으로 달려갔다. 이씨는 병원 응급의료센터에서 남편의 시신을 확인한 뒤에야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오열 끝에 실신한 이씨는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귀가했다.
미국 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아들과 딸도 박 지사의 투신자살 사실을 알고 큰 실의에 빠졌다. 아들은 30일 귀국할 예정이나 딸은 출산을 앞두고 있어 귀국이 어려운 상황이다. 아들이 다친 것으로만 알고 있던 노모(84)는 전남 장성군 진원면 박 지사의 고향집에서 광주 큰 딸 집으로 가던 도중 사망 사실을 알고 "복잡한 마음에도 '괜찮다'는 말만 계속했던 아들이 안쓰러워 전화도 못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작스런 자살 소식을 접한 도청 직원들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며 일손을 놓은 채 망연자실했다. 송광운 행정부지사는 오후 긴급간부회의를 열고 박 지사의 장례 절차 등을 논의한 뒤 기자회견에서 "충격적인 사태를 맞아 뭐라 말할지 모르겠다. 차질 없는 도정 수행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이준택기자 nagne@hk.co.kr
■檢 "강압수사 없었는데" 곤혹
검찰은 29일 박태영 전남지사가 자살하자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표정이다. 무거운 분위기의 대검은 이번 사건에 유감을 나타내는 동시에 이례적으로 언론에 "이번 사건에 냉정하게 대처해 달라"고 요청까지 했다.
검찰은 무엇보다 사회 저명인사의 '자살 도미노'가 또다시 강압수사 의혹을 부르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자칫 개혁의 주체로 거듭 태어나려던 검찰이 개혁의 대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검찰은 박 지사의 자살이 공교롭게도 정치인에 대한 과잉수사 논란이 불거진 때 일어났다는 점에 대해서도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이 때문에 불법 대선자금 등 주요 사건 수사의 진행이 늦어지거나 보류될 가능성도 있다. 당장 이날 자민련 이인제 의원에 대한 강제구인이 미뤄졌다.
검찰은 박 지사의 자살이 강압수사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대검 수뇌부는 "박 지사측이 혐의를 일부 시인하기로 변호사와 얘기가 오갔다"며 심리적 압박이 자살의 배경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한 법조인은 "자살사건이 발생한 이상 검찰도 수사방식에 문제가 없는지 점검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태규기자 tglee@hk.co.kr
■ 박태영지사는 누구
29일 한강 투신으로 인생을 마감한 박태영(63) 전남지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인연으로 정치인으로 변신, 14대 국회의원과 산업자원부 장관을 역임한 인물.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박 지사는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뒤 1967년 한국외환은행 행원을 거쳐 77년 교보생명 전신인 대한교육보험 과장으로 옮긴 뒤 91년 부사장까지 승진했다. 박 지사는 이 회사에서 14년 근무하는 동안 자산을 100배 가까이 늘리는 등 우수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80년 광주민주화운동 때 도피 중이던 권노갑 전 의원을 숨겨 준 인연과 박지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두터운 교분을 쌓은 것을 계기로 92년 14대 총선에서 당선돼 '경제통'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96년 15대에서 당내 공천에서 탈락한 뒤 제15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참여했으며 98∼99년 산업부 장관을 역임한 뒤 2000∼ 2001년에는 국민건강보험공단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이번에 검찰 수사를 받은 것도 건보공단 이사장 재직 당시 부하 직원들의 비리 연루 혐의 때문이다. 2002년 민주당 전남도지사 후보 경선에서는 5선 의원 출신으로 3번째 민선 도지사에 도전한 허경만 전 지사를 물리쳐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전남도지사 취임 이후 '경제지사'를 내세우며 지역경제 살리기에 전력했으며 초기에는 독단적인 의사결정으로 한 때 직원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모(59)씨와 1남1녀.
/광주=김종구기자 sori@hk.co.kr
■ 건보공단 사건
국민건강보험공단 비리 사건은 박태영 전남지사가 공단 이사장으로 재직할 당시 간부들이 인사 및 납품 과정에서 조직적으로 금품을 챙긴 사건으로, 지난해 말부터 검찰에 의해 본격적인 수사가 진행됐다. 검찰은 지난해 12월 편의를 봐주는 대가 등으로 납품업체들에서 총 3억2,000만원을 받은 공단 신모(47) 부장을 구속하면서 신씨가 받은 금품이 먹이사슬처럼 복잡하게 얽혀 공단의 고위층으로 상납된 단서를 포착했다.
검찰조사 결과 신씨를 포함한 간부들은 부하직원과 짜고 업체들로부터 납품 성사 대가로 계약 대금의 1%를 받아내 이를 윗선에 상납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이사장 비서실장과 총무관리실장, 총무상임이사 등 고위직 간부들에게 뇌물을 준 직원들이 인사과정에서 승진한 사실도 밝혀졌다.
검찰은 이후 2개월 여의 수사 끝에 2월 임모(59) 전 총무상임이사 등 공단 간부 8명을 구속하고 1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임씨는 부하직원에게서 1,500만원을 받았고, 김모(52) 전 비서실장과 김모(58) 전 경영전략본부장 등도 부하직원에게서 받은 6,500만원을 나눠 가진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수사 과정에서 당시 이사장이었던 박 지사 측근 인사들의 혐의가 줄줄이 드러나자 박 지사에 대한 내사에 착수, 소환조사를 거쳐 사법처리할 것임을 시사했었다.
/황재락기자 find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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