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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자 춘추]고3 딸과의 "사과찌끼"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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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자 춘추]고3 딸과의 "사과찌끼" 논쟁

입력
2004.04.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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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인 딸아이가 다니던 영어학원을 끝내기로 한 날, 우리는 해방된 저녁시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세종문화회관 소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피그말리온'을 보았다. 딸아이와 나는 객석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앉아 여자 주인공 일라이자가 어색한 말투로 상류계급의 영어를 흉내내는 모습에 배꼽을 잡고 웃었다. 연극은 일자무식의 꽃 파는 소녀 일라이자가 언어학자 히긴스 교수의 도움으로 6개월도 안돼 전문가들도 외국의 공주라고 속을 정도의 완벽한 영어를 구사한다는 내용이다.얘기가 이쯤되면 연극의 마무리는 둘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끝난다는 정도가 되겠지. 그러나 일라이자는 영어의 문법과는 상관없이 삶과 정면으로 부딪치며 얻은 지혜가 있었다. 그녀 생각에 히긴스 교수는 남편으로든 후견인이로든 함께 살만한 남자가 못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그녀는 비명에 가까운 웃음을 터뜨리는 히긴스 교수를 남겨두고 떠난다. 교수는 자신이 뜻하는 대로 일라이자를 하나의 완벽한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데에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그녀의 완벽한 신뢰와 사랑을 얻어내는 데에는 실패한 것이다.

일라이자가 자신이 단순히 실험대상만이 아닌 감정이 있는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히긴스 교수의 얼굴에 슬리퍼를 던지면서까지 깨우쳐 주던 밤, 그는 여전히 폼을 잡으며 사과를 우적우적 씹어먹는다. 사과라는 것이 먹고 나서 입안에 찌끼가 많이 남는 과일이라 히긴스 교수가 무슨 이야기인가를 하며 자신을 정당화하려 할 때마다 입에서 사과찌끼가 튀어나오는데, 그가 아무리 세상의 모든 언어에 정통하다 한들 그의 말들은 일라이자의 마음에 사과찌끼만큼도 가 닿지 못한다. 사과찌끼는 세상을 마음으로 껴안는 데에는 서투른 히긴스 교수 내면의 파편과 같은 것인가.

딸아이는 내 사과찌끼 해석이 아무래도 좀 오버하는 것 같다고 했다. 히긴스 교수를 연기한 배우가 의도적으로 사과찌끼가 입에서 튀어나오는 연기를 한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히긴스 교수 덕택에 세련된 영어를 구사하게 된 일라이자가 자신이 바라는 대로 꽃집을 운영하며 잘 살게 될 것이라는 데에는 동의했다. 씩씩하게, 그리고 많이 사랑하며….

/박성봉 경기대 다중매체 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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