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월28일 부통령 이기붕 가족이 경무대(지금의 청와대)에서 자살했다. 4월혁명으로 대통령 이승만이 하야 성명을 낸 지 이틀 만이었다. 이기붕의 장남이자 이승만의 양자였던 이강석이 권총 두 자루로 아버지 이기붕과 어머니 박마리아 그리고 동생 강욱을 차례로 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기붕은 4월혁명의 도화선이 된 그 해 3월15일의 정부통령 선거에 이승만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해, 악명 높은 부정 선거를 통해 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4년 전 선거에도 여당인 자유당 후보로 나서 부통령 자리를 노렸다가 민주당의 장면에게 패배한 바 있다.서울 출신의 이기붕은 연희전문학교와 미국 아이오와주 데이버 대학에서 공부하고 해방 뒤 이승만의 비서로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 뒤 서울시장, 국방부 장관, 민의원 의장을 지내며 이승만의 오른팔 노릇을 했다. 장남을 이승만에게 양자로 주었을 정도로 이기붕 부부와 이승만의 관계는 각별했고, 그래서 이기붕의 세도도 가히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 할 만했다. 그의 서대문 자택은 '서대문 경무대'로 불렸고, 문인들 가운데는 그에게 아첨하는 것으로 영달을 꾀하는 이른바 '만송족(晩松族)'이라는 것이 생겨났을 정도였다. 만송은 이기붕의 호다.
이기붕이 권력 핵심부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이승만에 대한 충성심이나 행정가로서의 능력에도 기인했지만, 아내 박마리아가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와 유지한 밀접한 관계 덕분이기도 했다. 프란체스카와 박마리아의 관계는 이승만과 이기붕의 관계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박마리아는 강원도 강릉 출신으로 이화여전을 거쳐 미국에 유학했고, 귀국해서는 모교 강사로 출발해 이화여대 부총장까지 지냈다. 그 세대의 많은 '여성 지도자들'처럼, 그도 태평양 전쟁 시기에 '임전보국(臨戰報國)'을 독려하는 데 앞장섰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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