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제네바에서 개최된 제60차 유엔인권위원회는 찬성 29표, 반대 8표, 기권 16표로 북한 인권 결의안을 채택하고 북한 담당 특별인권 보고관을 임명키로 했다. 지난해 표결에 불참했던 한국 정부가 이번에는 기권 표를 던졌다. 한반도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 기권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게 정부의 입장이다.일부 시민 단체들은 정부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참여정부가 말로는 인권과 민주주의를 외치지만 정작 북한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이중적 가치기준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한국 정부가 이렇게 미온적 자세로 일관한다면 아예 유엔인권위 회원국 자리를 반납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비판이다.
그러나 정부의 '특수 상황' 논리도 재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현재 한반도에 가장 시급한 것은 전쟁의 개연성을 최소화하고 평화의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 남북한 간 정치, 군사적 신뢰 구축은 필수적 선결 조건이다.
북한이 내정 간섭이자 체제 붕괴 의도로 간주하고 있는 인권 문제를 우리 정부가 공개적으로 거론할 경우 신뢰 구축은 고사하고 과거와 같은 적대 관계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 인권과 평화를 동시에 이룰 수 없는 한반도의 모순구조를 감안할 때 '선 평화, 후 인권'이라는 정부의 기본 입장을 일방적으로 비판만 해서는 안될 것이다.
생존권과 인권의 우선 순위도 문제시된다.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인 메즐로우는 인간 욕구의 위계질서를 논하면서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의, 식, 주, 공공보건과 같은 생리적 기본 욕구의 충족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인권은 자아실현이라는 인간 욕구의 마지막 단계라는 것이다. 이는 인도주의적 지원을 통한 경제, 사회, 문화적 권리 증진을 우선적으로 강조하는 국제 인권 규약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 논리에 따르면 시민 또는 정치적 권리로 표현되는 인권도 중요하지만 식량, 에너지, 약품 등의 지원을 통해 북한 주민의 생존을 담보해 주는 것이 더욱 시급한 과제라 할 수 있다. 인권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오히려 북한 주민의 생존권에 대한 지원까지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한 국가의 민주주의나 인권은 주민들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자생적으로 획득되는 것이지 외부의 개입과 압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북한도 예외는 아니다. 개방, 개혁을 통해 시장경제와 시민사회가 확대되고 생활수준이 향상되면 북한 주민 스스로가 인권을 위한 투쟁에 나서게 될 것이다. 아마 한국보다 이 과정을 웅변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는 이 과정을 가속화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한 정책 대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히 해 두자. 아무리 정치문화적 특수성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북한이 결코 인권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점이다. 핵과 미사일 현안이 해결되고 북미, 북일 수교가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인권 문제가 불거져 나올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북한도 지금부터 인권 문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한국 정부 역시 조용한 외교를 통해 북한 인권이 개선될 수 있도록 다방면의 노력을 전개해 나가야 할 것이다.
문정인/연세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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