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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천 출신 탈북자 윤철씨 애끊는 사모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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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천 출신 탈북자 윤철씨 애끊는 사모곡

입력
2004.04.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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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제발 살아만 계셨으면…."용천 출신 탈북자 윤철(50)씨는 술이 몇 순배 돌자 눈시울을 붉혔다. 한국에 온 지 9년. 서울 광진구 능동 어린이대공원 변전부에 근무하며 번듯한 집도 마련하고 알뜰한 아내도 만나 나름대로 성공한 축에 속하는 탈북자지만 용천 폭발사고 이후 북에 두고 온 칠순의 노모와 남동생 생각으로 매일 술과 한숨을 달고 산다.

윤씨는 사고 직후인 23일 같은 고향출신 후배가 사고 소식을 전해 주었으나 그냥 역 인근 유조탱크가 하나쯤 터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역 반경 수백m가 폐허가 됐다는 언론보도를 접하고 나서는 역 앞에 사는 어머니와 남동생 걱정 때문에 속이 바싹 타버렸다. 생사라도 확인하려고 이북5도위원회 등 관련기관에 연락을 해 봤지만 허사였다.

윤씨는 "탈북 직전에 어머니가 '너만이라도 편한 곳에서 살수 없을까'라고 물었을 때 '그런 소리 하지 말라'며 탈북 결심을 숨긴 것이 지금도 가슴에 사무친다"고 글썽거렸다. 윤씨는 용천 위성사진을 들이밀자 "사고현장에서 대각선 방향 '꼟'자 건물이 소학교 건물"이라며 손에 잡힐 듯한 고향 땅 여기저기를 설명했다.

평양에 사는 성분 좋은 집안 출신이었던 윤씨는 아버지가 한국 전쟁 당시 국군을 도와준 사실이 들통나면서 6세 때인 1960년 어머니 두동생과 함께 함경도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다. 지옥 같은 생활을 하던 세 식구는 6년만에 친척의 도움으로 야반도주해 용천에 정착했다.

그러나 정치범의 아들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채석장 인부 등 최하층 생활을 면할 수 없었다. 82년 러시아 아무르주에 위치한 재소(在蘇) 임업 대표부 제2연합 기업소 운전수로 파견되면서 생활이 나아졌지만 북에서 구급차 운전을 하던 동생이 교통사고로 사람을 죽였다는 누명을 써 감옥에 갇힌 사실을 알고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 모스크바로 도주했다.

모스크바에서 장사에 성공, 운전사까지 두며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했지만 나라 없는 설움은 어쩔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유엔고등판무관실에 망명을 신청, 95년 한국 땅을 밟았다.

"'항상 아래를 보며 살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되새기며 탈북의 고통을 이겼다"는 윤씨는 "잘 살고 있는 아들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안형영기자 ahn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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