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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띄우는 편지

입력
2004.04.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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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고개를 들어 산을 한번 바라보십시오. 대충대충이 아니라 눈을 가늘게 뜨고 집중해서 말이죠. '평소와는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드실 겁니다.우리의 산에는 소나무와 잎을 떨구는 나무들이 섞여서 자라고 있습니다. 소나무는 사시사철 푸른 나무입니다. 지난 해 낙엽을 떨궜던 나무들은 이제 새 잎을 활짝 피웠습니다. 소나무의 색깔은 '옛초록'이고 활엽수의 색깔은 '새 초록'입니다. 두 가지 초록이 한데 어우러집니다. 진초록의 산에 연초록의 폭죽이 터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같은 색깔이지만 농도에 따른 변주의 화려함이 만만치 않습니다. 바야흐로 '신록의 계절'입니다. 색깔의 변주가 희미해지다가 같은 농도로 통일이 되면 여름이 시작됩니다.

신록의 산은 날씨에 관계없이 아름답습니다. 맑으면 햇살을 받아 눈이 부시고, 비가 오면 물기를 머금어 반짝입니다. 옅은 안개라도 낀다면, 몽환적인 수채화가 따로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가을의 만산홍엽(滿山紅葉)보다 이 계절의 신록을 더 좋아합니다. 땅에서 솟는, 그리고 하늘에서 쏟아지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으니까요. 바라보고만 있어도 눈이 맑아지고 머리가 개운해집니다. 그 기운을 제대로 받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간단합니다. 숲 속에 직접 들어가는 것입니다.

평일이었지만 무릉계곡은 비어 있지 않았습니다. 주차장의 절반 가량이 차 있었습니다. 겨우 걸음마를 하는 아이를 데리고 온 젊은 엄마 아빠, 이미 은퇴한 듯한 백발이 성성한 노부부, 수다를 떨며 걷는 아주머니 부대….

공통점이 있다면 이들의 표정입니다. 모두 밝습니다. 화려한 봄꽃을 보고 화들짝 놀라는 듯 환호하는 표정이 아닙니다. 깊은 행복에서 나오는 은근한 미소입니다.

트레킹의 종착지인 용추폭포 근처에서 배낭을 벗었습니다. 신록의 그늘이 드리워진 너럭바위에서 땀을 식혔습니다. 옆에는 나이 지긋한 부부가 쉬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누워서 눈을 감고 있었고 여자는 앉아서 과일 껍질을 비닐 봉지에 담고 있었습니다.

"여보, 이제 내려 가죠?" 아주머니가 말했습니다. 아저씨가 눈을 가볍게 뜨고 "뭘 그렇게 서둘러? 이렇게 좋은데. 우리가 올해 안에 또 이런데 오겠어?"라고 말하며 다시 눈을 감습니다. 그리고 행복한 듯 은근한 미소를 짓습니다. 아주머니도 같은 표정이 됩니다. 연초록 신록의 미소입니다.

/권오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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