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공 말기인 1987년 4월 나는 흥사단 이사회 결의를 거쳐 직선제 개헌을 하고 새로운 헌법에 따라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역사 깊은 단체로서는 처음으로 낸 체제 개혁 성명이요, 흥사단으로서는 과거에 없던 정치적 발언이었다. 이 성명은 동아일보 1면에 꽤 크게 보도됐고, 그로부터 약 1주일 후에 김수환(金壽煥) 추기경도 거의 같은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흥사단은 그 강당을 각종 민주화운동 모임에 제공했기 때문에 한때 현실참여에 소극적이었던 이미지가 크게 달라졌고, 개헌 촉구 성명으로 민주화시민운동과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하나의 큰 전환점이 됐다.이제 도산기념사업회와 도산학회에 대한 얘기를 좀 해야 겠다. 흥사단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지만 그 이념에 찬성하는 사람들만의 특수한 조직이다. 그러나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은 흥사단 만이 독점할 수 있는 분이 아니고 전 민족의 스승이며 지도자이기에 해방 후에 선생의 뜻을 이어가기 위한 기념사업회가 따로 있었다. 신익희(申翼熙) 김성수(金性洙) 유동열(柳東說)씨 등이 번갈아 회장을 하며 이끌어 왔으나 73년 지금 강남에 있는 도산공원을 만든 후 모든 활동이 중지돼 있었다.
그래서 나는 흥사단의 원로 몇 분 외에 이희승(李熙昇) 선생, 김재준(金在俊) 목사, 최태섭(崔泰涉) 한국유리 사장, 조순(趙淳) 김태길(金泰吉) 교수 등 각계 인사를 초청, 도산기념사업회를 새로 출발시키고 새 회장에 김상협(金相浹) 한적 총재를 추대했으며 나는 부회장을 맡았다. 제1차 사업으로 동숭동 흥사단의 가건물 강당을 헐고 그 자리에 약 360평(5층) 규모의 도산회관을 건립키로 했다. 도산회관 건축 때에 가장 많은 돈을 내신 분이 김창륜(金昌倫)씨로 그 선친이 1907년 도산선생께서 미국에서 돌아와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우고 마산동 도자기 공장을 세울 때 가장 많은 돈을 내신 분이어서 2대에 걸쳐 크게 공헌한 고마운 분이었다. 도산기념사업회 고문으로는 김재준 목사와 이희승 선생을 추대했는데 두 분은 자주 흥사단 이사장 사무실로 들러 우리를 격려해주고 조언을 해주셨다.
건물을 세웠으니 물리적 환경은 갖춰졌다. 이제 흥사단이 다 못한 도산사상의 연구와 보급에 힘써줄 학자들과 지식인의 모임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도산사상연구회를 또한 발기하게 됐다. 여기에 맨 처음 참여한 분들로서는 김태길 한기언(韓基彦) 조순 이한빈(李漢彬) 김신일(金信一)교수, 역사학자로는 윤병석(尹炳奭) 교수 등이 있고, 초대 회장은 한기언, 부회장은 조순 교수가 각각 맡았다. 지금은 이만열(李萬烈) 국사편찬위원장이 회장을 맡고 있으며 3년 전 도산전집 14권을 간행하기도 했다. 도산사상연구회는 작년에 도산학회로 명칭도 바꾸었다.
그런데 처음 세운 도산회관이 흥사단으로 인계돼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도산공원에 도산회관을 새로 건립하는 일을 추진하게 됐다. 도산공원은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이 존 F 케네디 당시 미국 대통령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로스앤젤레스에 들렸을 때 환영회 회장을 맡았던 도산의 아드님 안 필립(할리우드 배우)씨를 만난 것이 계기가 돼 73년 조성됐다.
나는 흥사단 이사장과 공의회장을 두 번씩 연임한 뒤 도산기념사업회 제2대 회장에 강영훈(姜英勳) 선배를 추대하고 내가 부회장이 돼 98년 새 회관을 세웠다. 포항제철, 강남구청, 보훈처, 독지가 등이 도움을 주었다. 그 안에 도산과 독립운동에 관한 자료를 수집해 보관하고 순회전시도 하고 있다. 작년에는 삼성전자와 국가보훈처의 도움으로 조각가 이승택(李承澤)씨가 제작한 구리 빛 불변색의 도산 동상도 새로 다시 세웠다. 이러한 일을 진행하는데 모든 업무를 책임지고 열정적으로 일한 도산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최종호(崔宗鎬)군의 노고를 칭찬하고 싶다. 우리나라 민족 자생의 운동단체로는 천도교 다음으로 가장 오래된 역사와 전통을 가진 흥사단은 도산기념사업회, 도산학회와 더불어 무실역행(務實力行) 애국애족의 정신으로 도산의 유지와 유업을 계승 발전시키기에 힘쓰고 있다.
/서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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