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하자니 봐줄 만은 한 것 같고, 그렇다고 얼싸안아줄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고…, 심란합니다." 24일 오전 충남 천안시 문화동 (기존)천안역 광장에서 만난 30대 회사원은 고속철도에 대한 애증의 소회를 그렇게 풀었다. "얼굴 반반하고 튼실해서 데려온 며느리가, 하라는 일은 안하고 먹기만 먹어대는 꼴 아닙니까." 그 '며느리' 탓에 이제 이웃과의 불화마저 걱정스럽게 됐다. 자치단체 간 갈등을 두고 하는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역사(驛舍) 이름을 둘러싼 천안·아산시의 자존심 공방은 도로 표지판 시비에다 택시 영업권이라는 생계의 문제로 비화, 얽힌 타래처럼 갈수록 꼬여가는 형국. "좋은 게 좋다고, 개통하면 다 잘 되려니 했는데 아직 요 모양 요 꼴입니다."
오전 11시, 천안역 광장에는 30여 대의 택시들이 목을 빼고 서있었다. 승객을 부려놓고 떠난 오전 9시50분 서울발 진주행 새마을호 열차 손님을 맞이하려는 행렬. 하지만 짐이나 많으면 모를까, 100여명의 승객들은 금세 구 도심의 인파 속으로 스며들거나 버스 정류장으로 걸음을 옮겼고, 넓지 않은 광장은 다시 봄날의 나른함으로 빠져들었다. 딴은, 평일 한낮 2등열차 손님에게 시간이 뭐 그리 아쉬울까.
"불경기 불경기 해쌌지만, 한 달 전만해도 천안 역전 택시 경기야 그럭저럭 괜찮았죠. 그걸 아산에 몽땅 빼앗긴 것 아닙니까." 천안역에서 천안·아산 고속철도 역사로 이동하는 동안 40대 택시기사는 비분강개로 일관했다. "고속철도 들어서면 모두 나아질 줄 알았는데, 웬걸요. 개통 첫날 거기 구경 삼아 한 번 가보고, 오늘 손님이 두 번쨉니다."(그럴 만하다 싶은 것이, 구역사-신역사 택시 요금이 서울-천안 새마을호 요금과 맞먹었다. 휴우∼)
고속철도 승객 열에 일고여덟은 천안 주민. 하지만 역사가 행정구역상 아산시 배방면 장재리여서 천안 택시는 역 구내 영업은 물론이고 5분 이상 정차도 안된다. 그래서 억장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역사 오른편 끄트머리에 천안시가 마련해둔 천안택시 '쉼터'라는 게 있지만, 입구에서 300여m나 떨어져 있으니, 손님이 있을 턱이 없다. 쉼터는 텅 비어 있었다.
천안·아산역사도 휑하긴 마찬가지였다. "오전 9시30분대 열차 뒤로 3시간 공백이고, 낮 12시30분에 한 대 서고 나면 4시나 넘어야 또 들어와요(하행 기준)." H운수 택시기사 이호천(33)씨. "기대만은 못해도 수입이야 예전보다 낫죠. 그래서 천안 택시들이 난리들 치는 것 아닙니까." 그는 "천안 택시들이 아산에 있는 고속철도 역에 와서 장사하겠다는 논리는 일본놈들이 독도를 지네 땅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은 것 아니냐"며 동의를 구했다. 맞장구치기 뭣해서 빙긋 웃기만 하자 "인구 적고 힘 없다고, 아산 알기를 홍어X으로 안다니까." 머쓱한 듯 혼잣말로 '양보 불가'의 결의를 내비쳤다. 아산시는 최근 천안시 진입요금 할증을 폐지, 요금 시비를 차단하는 등 영업권 굳히기에 들어간 듯 보였다.
천안·아산역 광장 오른편에는 달포 전에는 없던 차량 차단벽이 세워져 광장을 양분하고 있었다. 천안 불당동이나 두정동, 공단쪽에서 역광장을 질러 역사 왼편의 신흥 아파트촌인 천안 신방동이나 쌍용동, 아산시 등으로 이어지는 길을 막은 것이다. 이유를 물었더니 천안·아산역 관계자는 "통근시간에 정체를 피해 질러가는 차들이 많아 혼잡이 우려되는 까닭도 있지만, 실은 아산 택시업계가 천안 택시들 못 들어오게 막아달라고 요구해서 시설공단이 최근에 만든 것으로 안다"고 대답했다.
천안·아산역 하루 이용객은 700∼1,000명 꼴. 정기권을 끊어 통근·통학하는 이는 100명이 채 안된다고 했다. 5, 6년 뒤 아산 신도시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승객이 늘어나더라도 완만히 늘어날 것이라는 게 관계자의 전망. 이를 두고 촉발된 두 도시의 마찰은 건설교통부와 충남도의 끊임없는 중재에도 불구하고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천안시측은 '고속철도 역사만 택시 공동사업구역으로 풀자'는 것이고, 아산시는 '풀고 싶으면 두 도시 전체를 풀자'는 입장이다. 인구 20만명에 택시 674대의 아산시와 50만명 1,708대의 천안시 사업구역 전체가 통합되면 아산 택시업계가 유리한 것은 자명한 이치이고, 고속철도 역사만 영업권을 풀게 되면 아산 택시업계로서는 알짜배기를 내어주는 꼴이니 천부당 만부당하다는 주장이다. 충남도가 '역사구역 우선 통합, 6∼12개월 이후 시 전체 사업구역 통합'이라는 중재안을 던졌지만, 양 도시 전체 사업구역 통합은 아산 신도시 개발완료 이후에나 생각할 문제라는 입장으로 맞서 있다.
두 지자체는 고속철도 역사 안내 도로표지판이며, 천안―당진 고속도로 노선 등을 두고도 티격태격이다. 다급한 천안 택시업계가 22, 23일 양일간 충남도청 앞에서 시위를 벌이며 도의 적극적인 중재를 촉구했지만, 충남도 입장에서도 묘안은 없는 상태. 도청 관계자는 "택시 영업구역 지정은 시장·군수 권한인 만큼, 양 시가 협의를 통해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원칙론만 되풀이했다.
전북 익산시 창인동의 익산역사 환승 문제도 해법이 없기는 마찬가지. 철도청이 1,300평 남짓 되는 역 광장의 일부를 내놓고 전주 군산 등 인근 대도시를 연계하는 시외버스 승강장을 마련토록 했지만, 익산시 교통업계의 반발로 노선조차 개설되지 못했다. 택시도 역 광장 바깥의 편도2차선 도로변 임시 승강장을 활용하고 있었다. 익산시청 관계자는 "시내버스며 택시업계의 운영난을 누구보다 잘 아는데 철도청 편의만 생각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전주며 군산 시민들로서도 이 판국에 굳이 익산까지 와서 고속철도를 이용할 까닭은 없어 보였다. 전주만 하더라도 10분 간격으로 서울 연계 고속버스(2시간30분 소요)가 있으니 굳이 고속철도(1시간38분 소요)를 타려고 시외버스로 익산터미널까지 와서 택시나 버스 편을 이용해 2㎞ 떨어진 역까지 찾아올 리 만무한 것이다. 가뜩이나 호남선 고속철도의 경쟁력이 취약한데 환승 교통편마저 엉망이다 보니 아쉬운 것은 익산역이고, 철도청이다.
익산역 관계자는 "건교부 중재안은 택시 정류장이라도 만들라는 것인데, 철도청 입장에서는 연계 버스노선이 급하지 택시가 급한 게 아닌 만큼 택시 정류장 만들라고 광장 땅을 내주기는 곤란하다"고 말했다. 그는 전주·군산시 연계 버스노선만 생기면 승객이 현재보다 최소 30%는 늘어날 것이라며 답답해 했다.
/천안·익산=최윤필기자
walden@hk.co.kr
■고속鐵 환승체계 지자체장 손에 달려
고속철도 역사 버스·택시 환승체계의 칼자루는 해당 지자체장이 쥐고 있다. 따라서 철도청이 해법을 찾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다만 건교부나 광역자치단체가 적극적으로 나서 조기에 중재가 성사되기만 바라는 형국. 이용객들의 불편이 심화하거나, 고속철도 이용률이 계속 정체하면 수송수익 면에서도 막대한 손해다. 게다가 고속철도 효과에 부풀었던 지역주민들의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어 자칫 원성의 불똥이 철도청이며 고속철도로 튈까 전전긍긍이다.
철도청 관계자는 "서로 한 발씩만 양보하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을 일인데, 그게 그렇게 어렵다"며 "업계의 작은 이익을 위해 지역 전체의 이익과 국가적인 사업이 차질을 빚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익산역에서 만난 한 시민은 "그 엄청난 예산을 들여 사업을 시작하면서, 시장 여건조차 사전에 챙겨보고 미리미리 대비하지 않은 철도청의 자업자득"이라고 꼬집었다. 고속철도는 넘어야 할 산이 아직도 첩첩산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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