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공화국 시절인 1971년 4월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이 선거는 1987년 12월16일 제13대 대선이 치러지기까지 직접 선거로 치러진 마지막 대선이었다. 흔히 유신체제 또는 제4공화국이라고 불리는 박정희 정권 후반기와 제5공화국으로 불리는 전두환 정권 때, 대통령은 '선출'된다기보다 체육관에 모인 지지자들만의 요식 투표 뒤 '선언'되었다.제3공화국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한 번만 연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1969년 9월 대통령 3선 연임 허용을 골자로 한 제6차 개헌안을 여당계 의원만으로 날치기 통과시키도록 한 뒤, 1971년 오늘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세 번째 임기에 도전했다. 그는 이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 김대중을 95만 표 차이로 누르고 제7대 대통령이 되었다. 당시 여당의 압도적 프리미엄을 고려하면, 아슬아슬한 선거였다. 박정희 캠프는 7대 대선에서 이른바 '신라 임금론'을 내세움으로써, 건국 이후 정치 세력으로서는 처음으로 지역주의라는 흑마법(黑魔法)의 주술을 유권자들에게 걸었다. 7대 대선에는 두 후보 외에 정의당의 진복기, 국민당의 박기출, 자민당의 이종윤이 출마했다.
박정희는 선거 직전 장충단공원 유세에서 "다시는 국민에게 표를 달라고 나서지 않겠다"며 이번이 마지막 출마임을 강조했는데, 그는 대단히 엽기적인 방법으로 이 약속을 지켰다. 그는 이듬해 10월17일 '10월 유신'이라는 이름으로 파쇼체제를 수립함으로써 굳이 국민에게 표를 달라고 호소할 필요성을 원천적으로 없애버렸다. 그리고 자신이 의장을 맡은 이른바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의원들로 하여금 대통령을 뽑도록 해, 그 이후의 두 차례 선거에서 모두 100%의 지지를 받아 죽을 때까지 그 자리에 머물렀다. 그를 살해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처럼, 박정희도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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