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후 서울의 실업계 학교인 K상고. 종례를 마친 급우들은 이미 집으로 떠났거나 여남은 명이 운동장에 남아 공을 차고 있지만 도서관 열람실에서는 면학 열기가 뜨겁다. 교실로 임시 개조한 열람실을 가득 메운 25명은 올해 대학입시를 준비 중인 면학반 학생들이다. 간단한 영어 단어 시험을 마치고 교사의 지도로 영어 듣기를 익히는 모습이 여느 인문고 교실 못지않게 진지하다."고교 졸업장만 가지고는 비전이 없잖아요. 대졸자와 임금 차이도 많이 나고, 승진에서도 불이익을 받고…. 취직원서가 들어오긴 하지만 중소기업 뿐인데다 그나마 전공과는 무관한 3D업종이 대부분이죠."
중학교 때 성적이 좋았다는 면학반 학생 손모양은 "실업고 학생의 대학진학을 이상하게 볼 것이 뭐 있느냐"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린 여학생의 말 속에서 실업고 출신이 오갈 곳 없도록 만든 학벌 중시의 사회 풍토에 대한 가시 돋친 감정이 느껴진다.
하지만 문제는 손양 외에도 이 학교 고3 학생의 70% 가까이가 취업보다는 진학을 원하고 있다는 데 있다. 방과 후에 면학반을 개설하고, EBS 수능강의반에 70여명의 학생이 몰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보다 더 많은 학생들은 방과 후 실업계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학원으로 직행한다.
실업고는 원래 직업교육을 시켜 취직까지 하게 만드는 일종의 완성교육을 지향한다. 하지만 서울시내 실업고 학생의 절반 가까이가 그 이상의 교육을 받기 위해 대학으로 진학하고 있다. 지방은 더욱 심해 어떤 곳은 진학률이 60%를 상회한다.
서울시교육청에 따르면 올해 서울지역 79개 실업고 졸업생 2만4,617명의 진로를 분석한 결과, 45.3%가 4년제 대학 및 전문대에 진학한 것으로 나타났다.
실업고 학생의 대학진학률은 2001년 29.7%, 2002년 33.6%, 지난해 36.9%로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다. 부산지역 실업고 학생의 경우 진학률이 2002년 45%에서 올해 67.2%로 껑충 뛰었고, 인천도 올해 56.1%가 대학에 진학했다.
이처럼 최근 실업고 학생의 취업기피 현상이 두드러지는 것은 대학마다 실업고 학생에게 '정원 외 3% 특별전형'이란 특전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 200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부터는 실업고 학생을 위한 직업탐구 영역을 신설, 사회탐구나 과학탐구를 치르지 않고도 대학에 들어갈 수 있어 실업고 학생의 진학률은 더욱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다 근원적인 이유는 실업고 학생에게 마땅한 일거리가 제공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무자동화가 이뤄진 은행, 증권사 등 대기업의 취업의뢰가 전무하고, 그나마 중소업체에서 문의가 오지만 월 100만원 미만의 박봉이다.
하지만 진학률이 취업률보다 높아지면 실업고의 정체성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교육당국은 물론, 교육계도 "학벌 위주의 풍토가 바뀌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다"는 비관적인 분석만 내놓고 있다.
/김영화기자 yaa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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