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사회에서 우리는 모두 '역할인'이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기대와 요구에 맞는 행동양식을 보여야 한다. 각자는 복합적인 사회관계의 구성에서 일정한 지위에 놓여 있기 마련이다. 사회상황과 상호행위의 장(場)에서 행동양식의 전형을 준수하고 실행하도록 요구받는다. 역할에 대한 기대치나 중요도는 다를 수 있고, 시대의 가치나 규범에 따라 다양해지거나 변화할 수도 있다. 오랜만에 다시 들춰 본 역할이론의 줄거리다.■ 여기에 따라 남편의 역할, 아내의 역할을 말할 때 남편은 남편답게, 아내는 아내답게 행동해야 한다. 그러나 요즘 그 역할이란 것을 막연하게 60, 70년대 식의 양식으로 알고 덤벼들다간 큰 코 다친다. 마냥 인내하고 잘 따르기만 하는 아내를 말하다간 봉변을 당하기 십상이다. 가부장적 권위는 인정받기도 어렵고, 스스로 그리 강하지도 못한 게 요즘 남자들이다. 역할 중 가장 일반적인 것이 성과 연령에 따른 것이라고 하지만 성역할이 생물학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마가렛 미드가 뉴기니의 부족들을 연구한 결과로 입증한 바 있다.
■ 사회와 개인의 각 역할이 제대로 수행되지 못해 혼란스럽게 될 때 심리학은 이를 역할혼미(role confusion)라고 한다. 역할의 혼미는 바로 자아와 정체성의 상실이다. 이를 치유하기 위해 개발된 요법이 역할연기(role playing)이다. 연극수법을 이용한 집단요법의 경우 소시오드라머(sociodrama), 개인 환자를 대상으로 한 요법은 흔히 사이코드라머라고 한다. 무대정치나 사전각본이 없이 환자나 학생이 제시된 문제에 대해 자발적 즉흥적 연기를 하도록 하는 방법이다. 역할연기의 주된 기법은 역할교대이다. 주역이 상대역을, 상대역이 주역을 연기토록 역할을 서로 교대하는 것이다.
■ 4·15총선이 국회의 다수당을 바꿈으로써 이제부터 여야는 역할을 교대해야 한다. 47석의 제3당에서 일약 과반정파의 집권당으로 변신한 열린우리당이 자신의 역할과 자아를 제대로 인식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야당이면서도 마치 집권 상태의 심리 속에 안주했던 한나라당의 대오각성, 환골탈태도 주목된다. "잠시라도 방심하면 뒤집어 지는 게 정치"라고 한 노무현 대통령의 말이나, "과거로 돌아가려고 하면 끝장"이라고 강조한 박근혜 대표의 말들은 각기 입장의 '역할인지' '역할평가'라 할 수 있다. 50년 만에 진보의 새 지평을 연 민주노동당의 '역할창조'에도 국민의 관심은 비상하다.
/조재용 논설위원 jae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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