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도 피해자 명단은 있을 것 아닙니까. 생사 여부만이라도 알게 해 주세요…."1,500여명의 사상자와 8,000여명의 이재민을 낸 것으로 알려진 북한 용천역 폭발 참사 발생 나흘째인 25일, 용천군 출신 실향민과 탈북자들은 용천군에 살고 있는 혈육들이 화를 입지 않았을까 걱정하며 뉴스속보에 귀를 기울였다.
평안도민회 명예 용천군수인 조경하(74)씨는 용천읍내에 살고 있는 형수와 조카 4명에 대한 걱정 때문에 연일 밤잠을 설치고 있다. 수첩에 조카들의 현 주소와 직업, 직책들을 일일이 적어놓고 있을 만큼 조카 사랑이 남다른 조씨는 "갈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다"고 말했다.
특히 형수와 조카들의 거주지가 용천소학교 인근인 탓에 조씨는 행여 혈육들이 불귀의 객이 됐을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다.
조씨는 독립운동을 하다 중국에서 귀국한 아버지와 함께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전 남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유일한 형제인 형님은 지병을 앓고 있던 할아버지, 할머니와 용천에 남았다. 조씨는 "형님이 운명하신 것을 보지 못해 늘 마음에 걸렸는데 조카들만이라도 제발 무사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씨는 2002년 사비를 들여 중국 단둥에서 형수를 만나기도 했다. 조선족 등에게 한 차례 사기까지 당하는 등 고생 끝에 이뤄진 만남이었다. 조씨는 형수를 만나 이틀 밤을 함께 지내며 사진까지 주고 받고 꿈에 그리던 고향 용천의 소식도 들었다. 조씨는 "형수는 1950년 헤어질 때 모습 그대로였다"며 "형수에게 제발 별일이 없기만 바랄 뿐"이라며 말을 맺지 못했다.
아버지 고향이 용천인 이북도민회 평북 중앙청년회 산하 용천청년회 안문권 회장의 마음도 답답하기만 하다. 용천에 살고 있을 큰아버지와 삼촌 등 혈육의 생사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안씨는 "북한 당국이 사상자 현황을 국제사회에 구체적으로 공개하고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용천 출신 탈북자들도 걱정이 태산 같기는 마찬가지. 용천에서 자동차사업소 운전기사로 일하다 1998년 입국한 천용선(67)씨는 용천읍에 둘째, 셋째 딸이 살고 있고 용천역에서 5㎞ 정도 떨어진 신암리에 막내 딸이 살고 있다. 천씨는 "사고 소식을 접한 뒤 딸들의 안부 걱정에 일이 손에 안잡힌다"며 불안감을 토로했다.
천씨는 "가족 소식을 알아보려면 돈이 필요한데 정부로부터 받은 정착금을 사기 당해 방법이 없다"며 "북한에서 정확한 사상자 명단이라도 발표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용천역과 인접한 용암포 출신으로 1996년 탈북한 최모(31·여)씨는 "부모 형제는 용천읍에서 15리 정도 떨어진 곳에 살고 있어 그나마 안심이 된다"며 "그래도 고향 사람들이 모두 무사하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최영윤기자 daln6p@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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