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오르한 파묵 지음·이난아 옮김 민음사 발행·9,000원
노벨문학상 단골 후보인 터키의 대표 작가 오르한 파묵(52·사진)의 장편소설 '내 이름은 빨강'이 번역 출간됐다. 1998년 원작이 나온 뒤 터키 국내에서는 물론, 이미 세계 30여개국에 번역 소개되어 호평 받은 소설이다. 청년시절 건축학도에서 전업작가로 인생을 급차선 변경한 파묵이 그 동안 써온 작품의 주제는 거의 한 지점으로 수렴된다. '이질적인 문화의 갈등'이다.
이번 소설보다 먼저 국내에 소개된 '새로운 인생'(민음사 발행)은 서구문화와 터키 토착문화가 충돌하는 풍경을, 85년 발표한 '하얀 성'은 유럽 학자와 터키 학자의 만남과 고뇌를 그렸다. '내 이름은 빨강'도 이런 문제의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오리엔탈리즘'이나 '문명충돌'이 일찌감치 세계의 화두가 됐으니 파묵의 이런 주제의식이 세계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하지만 파묵의 작가적 역량을 그가 나고 자란, 동·서양 문명의 교차로에 있는 터키의 '지정학'의 은혜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 어느 작품보다 그 점을 잘 보여주는 것이 '내 이름은 빨강'이다.
소설은 16세기 말 눈 내리는 이스탄불 외곽의 한 우물 밑바닥에 살해돼 버려진 금박세공사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죽은 자가 자신이 죽게 된 상황을 찬찬히 들려주는 첫 장부터 심상치 않다. 금박세공사 엘레강스의 죽음을 둘러싼 정황이 다양하게 묘사되고, 죽음에 대한 의문이 커지는 과정에서 또 다른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누가 범인일까? 왜 그들을 죽였을까?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궁금증을 풀어간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추리소설인 동시에, 대제국 오스만 투르크의 전성기를 무대로 화법(畵法)을 둘러싼 예술가의 갈등을 다루는 역사소설이다. 수년 전 베네치아의 궁전과 귀족의 저택에서 보았던 초상화의 매력에 푹 빠진 궁정화가 에니시테는 군주인 술탄에게 유럽 화풍을 도입한 삽화를 실은 책을 제작하게 해달라고 설득한다. 술탄의 허락을 받은 에니시테가 세밀화가들을 동원해 비밀리에 제작에 들어가고, 신성모독적인 서양미술을 받아들이는 것에 불안을 느낀 화가들의 논쟁이 벌어진다.
베네치아의 그림에는 이슬람의 세밀화가들이 전래의 대가를 모방해 그린 이야기의 요소가 배제되어 있다. 오직 대상 자체에 집중할 뿐이며, 원근법이 살아있는 사실적인 그림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서양 화가들이 인간 중심의 세계를 추구한다면,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평면적으로 묘사하는 옛 대가들은 신의 관점에서 세상을 본다.
파묵은 이런 이야기를 죽은 자는 물론 에니시테, 카라, 오스만, 올리브, 나비, 황새 등 세밀화가와 다른 여러 사람의 입을 빌려 이야기한다. 시점은 모두 1인칭이고, 장마다 각각 한 사람이 이야기의 주인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그 화자가 사람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개도 말을 하고 나무, 금화, 심지어 죽음이나 빨강 조차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저는 그저 한 그루 나무이기보다는 어떤 의미가 되고 싶다"고 할 때 나무는 전통의 이슬람 화법을 지키려는 '보수주의자'다.
이야기는 미인 셰큐레를 둘러싸고 카라와 하산 그리고 살인자(올리브)가 벌이는 구애 때문에 감칠 맛을 더한다. 진지하고 그래서 다소 지루할지도 모를 이 예술가소설은 마지막 대목에서 묘한 활력을 얻는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그림에서가 아니라 '삶 자체에서 행복을 찾는다'는 현실주의자 셰큐레가 아들 오르한에게 들려주고 글로 쓰게 한 것이기 때문이다. 파묵이 바로 그 글 재주꾼 오르한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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