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을 보고 감상을 말할 때 나는 대체로 '고생했다'와 '좋았다' 중 하나를 택한다. 연극을 업으로 삼아 자주 만나는 처지니 '좋다'와 '나쁘다'를 불쑥 내밀기는 곤란하다. 침묵하기도 얄궂다. 그러다 보니 교묘한 언사로 코팅한다. 둘 다 나쁜 말은 아니지만 속내는 따로 있다. '고생했다'는 '당신, 참 열심이더군'이라는 말이고 '좋았다'는 '나한테, 좋더군'이라는 의미다. 내 주제로 감히 아마적인 것과 프로적인 것을 감별하는 기준이랄까.그래서일까. 자주 곤경에 빠지는 말이 '열심히'다. 왜 이랬어? 이러면 안 되잖아? 이렇게 망쳐 놔? 하면 대답인즉 '열심히'는 했다구요오! 한다. '열심'과 자웅을 겨루는 말에 '최선'이 있다. 그것 밖에 안돼? 고작 이거야? '최선'을 다했다구요오! 한다. 진지한 낯으로 자책하는 액션마저 보태면 그야말로 압권의 국면돌파다. 비난을 대번에 정리함과 동시에 공수(攻守)가 뒤바뀐다. 오히려 구구절절 변명에 꽁지가 빠지는 건 이쪽이다. 저기...그런 게 아니라...땜질하기 바쁘고 "그렇게 밖에 말 못해? 아비 없는 자식!" 하면서 휙 돌아서는 건 저쪽이다.
연애라고 다르랴. 사랑한다고 날밤 새가며 수놓아 선물한 애인의 십자수 수제팬티가 문제다. 웬 걸? 애는 썼는데 기능에 하자가 꽤 있다. 탈착이 어렵고, 보행 시 걸기적거리고, 대소사 및 방사 획책 시 불편이 이만 저만 아니다. 만들려면 잘 만들지 하는 원망에 내 마음 몰라, 내 마음 안 그래 하느라 토라지고 달래느라 이 밤을 지샌다. 그래 이쯤에서 타협하자. 정성이 갸륵하니 괴로워도 입자. 가려지기는 하니 입어버리자. 어쭈? 돌아보니 갈지자로 걸어다니는 무리가 꽤 되는 걸? 해서 세인(世人)들은 오늘도 술로 달래고 수다를 토하고, 이튿날이면 어김없이 씽긋씽긋 미소를 띄우며 프로와 아마가 상생하는 지구를 건설하는가 보다. 프로의 양보를, 아마의 미덕을 아느냐 모르느냐.
/고선웅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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