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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zine Free/홍보실 사람들 2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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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zine Free/홍보실 사람들 25시

입력
2004.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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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스스로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고 말하고 다닙니다. 국정원 직원이냐구요? 아닙니다. 기업 홍보실에서 일합니다. 우리 자신보다 회사를 위해 일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릅니다. 사내에서는 ‘반(半) 기자’ 혹은 ‘사제(社製) 기자’로 불립니다. 언론이 주 고객이자 출입처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자들과 친분관계가 두터워지고 라이프사이클도 기자와 비슷하기 때문이죠.오늘도 다른 사원보다 2시간 일찍 출근해서 신문에 난 회사 관련 기사를 체크하고 있습니다. 윗사람이 출근하기 전에 기사를 모두 스크랩해서 자리에 올려놔야 하거든요. 어제 모처럼 출입기자들과 가진 회식자리에서 마신 술이 지금도 깨지 않아 오늘은 좀 힘드네요.

요즘은 접대문화도 많이 변했습니다. 예전에는 비싼 술도 많이 마셨는데 이젠 대부분 소주에 삼겹살입니다. 더구나 어제 2차는 회사에서 보너스를 받은 김 기자가 냈답니다.

스크랩을 마치고 나니 기자들이 하나둘씩 보입니다. 김 기자는 전에는 정말 술 잘 마셨는데 요즘은 많이 약해진 것 같습니다. 이 기자는 평소에는 매너가 좋은데 술 한잔 마시니 많이 망가지네요. 약간 실망스럽습니다.

한때는 언론과의 관계를 잘 만드는 것이 홍보실 업무의 태반이었으나 요즘은 많이 달라졌답니다. CEO와 회사이미지 제고를 위한 업무가 더욱 중요해졌죠.

얼마전 남산 3호터널 인근에서 원룸아파트 공사가 진행중이었는데 아파트 베란다에 설치된 에어컨 실외기가 A전자 제품 일색인 것을 경쟁업체인 B전자 고위간부가 목격한 뒤 난리가 났었습니다. B사 홍보실은 즉각 건설업체를 찾아가 “에어컨을 무료로 교체해줄 테니 우리회사 제품을 써달라”며 온 몸으로 회유와 설득을 병행, 간신히 양해를 얻어냈습니다. A사의 강력한 항의로 결국 이 양해도 없던 일로 됐지만 홍보실의 업무가 얼마나 넓은지를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CEO 이미지 및 심기(心氣) 관리는 더욱 중요하죠. CEO의 스케줄을 챙기고 개인이나 가족사에 대한 언론의 질문에 답하며 신문투고, 방송인터뷰, 특강 등도 효과적으로 조정하죠. 최근 모 그룹의 경우 홍보실이 주축이 돼서 회사 경영권을 방어한 적도 있죠. 그만큼 홍보실 업무가 많아지고 중요해진 셈이죠.

저는 조금 있다 CEO가 작성한 언론사 기고문의 교정을 본 뒤 오후에는 광화문으로 가판 신문을 보러 갑니다.

참여정부 들어 가판 신문 구독문제가 도마에 올랐지만 미리미리 대처해야 하는 우리 입장에선 가판 신문이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경영과 관련된 기사가 잘못 나가면 뒤늦게 정정한다 해도 언발에 오줌누기가 되기 십상입니다. 또 그곳에 가면 타 회사 홍보실 직원을 많이 만나 업계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 맞으면 술도 한잔 할 수 있어 좋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홍보실에서 하는 일이 궁금하시다구요? 그럼 다음 페이지를 펼쳐보세요.

/한창만기자 cmhan@hk.co.kr

/사진=왕태석기자 kingwang@hk.co.kr

■초년병 "내일은 우리가 주역"

"우리가 미래의 홍보실 주역."

홍보실은 기업간 치열한 생존경쟁의 한 가운데에 서있는 곳이다. 당연히 같은 업종 다른 회사 홍보실 직원간에는 팽팽한 긴장관계가 설정되기 마련. 하지만 적과의 동침을 마다 않는 이들이 있다. 유통업체 홍보실 초년병들의 모임인 '홍아리'('홍보실 병아리'의 약칭)가 바로 그들.

10여년 전 부서 막내급 사원들끼리 모여 친목도모 차원에서 시작된 이 모임엔 롯데, 현대, 신세계, 경방, 뉴코아, 삼성플라자, 삼성테스코, LG백화점, 애경, 한화유통, 행복한 세상 등 11개 업체가 참여하고 있다. '병아리'그룹을 자처한 만큼 가입 자격(?)은 각 업체 홍보실의 1∼5년차 사원. 따라서 이젠 중견이 된 초창기 멤버들은 자연스럽게 뒷전으로 물러났다.

업무와 관계없는 사적 모임인 홍아리가 관심을 끄는 이유는 최근 정치권에서 강조하는 상생 정치의 모델을 엿볼 수 있기 때문. 회원들 대부분 하위 직급이다 보니 보도자료 작성, 업계동정 정리 등 '품은 들지만 폼은 나지 않는' 일이 많은데다 출입기자와 가장 일선에서 얼굴을 맞대는 경우가 많아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따라서 이들끼리 모이면 직장 상사나 짓궂은 기자들을 안주삼아 응어리를 토해낼 법도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언론에 기사를 잘 보도되도록 하는 노하우를 서로 주고받는가 하면 업계 단신을 한 사람이 취합, 언론에 배포하는 등 적과의 교류도 서슴지 않는다.

한 회원은 "최근 불황극복의 방안으로 3만원대 초저가 정장판매 이벤트를 한 적이 있는데 이와 관련된 정보를 회원들에게 전수, 모두 재미를 본 적이 있다"며 "이 것이 바로 윈윈전략 아니겠냐"고 반문한다.

마케팅, 영업 등 납품업체를 관리하는 부서가 '갑'의 위치라면, 언론을 상대하는 홍보 업무는 '을'의 위치여서 한때 기피부서로 꼽혔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홍보부서에 있으면 사회현상을 읽는 눈이 빨라져 다양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고, 실제로 이 아이디어들이 마케팅전략으로 채택되는 경우가 적지않다. 그만큼 승진과 보수에서 앞차를 탈 가능성이 높다.

홍아리 회장 하지성(30·현대백화점)씨는 "지금은 어설픈 병아리지만 이 모임을 통해 미래의 홍보주역으로 탄생하는 모습을 보아달라"고 주문했다. /한창만기자 cmhan@hk.co.kr

■성공한 기업 홍보맨들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은 "기업의 손익문제는 재도전의 기회가 있지만, 기업의 홍보는 곧바로 생사여부를 결정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기업 경영에서 홍보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덕분에 요즘 재계에서는 최고경영자인 CEO, 최고재무책임자인 CFO, 최고기술책임자인 CTO 못지않게 최고 홍보 담당자인 CCO(Chief Communication Officer)의 파워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언론기관 접촉, 해외 홍보, 행사 후원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자사의 이익을 챙기고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쉴새 없이 이어지는 업무를 소화하며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내는 국내 주요 기업 CCO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우선 삼성 구조조정본부 이순동(57) 부사장은 연세대 정외과를 나와 중앙일보 기자로 일하다 1984년 삼성전자 홍보과장으로 옮겼고, 97년부터 그룹의 '대변인' 역할을 맡고 있는 홍보업계의 대부. 홍보인 가운데 처음으로 임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국내 홍보업무의 체계를 잡은 인물로 평가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아 '홍보=술'이라는 불문율을 깬 것으로도 유명하다.

LG CCO인 정상국(51) 부사장은 연세대 철학과를 나와 LG화학에서 무역 업무를 맡다 90년부터 그룹 홍보팀으로 자리를 옮겼다. 각종 현안과 이슈를 분석하고 요약·정리해 알기 쉽게 전달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주변에 사람을 끌어들인다. 그는 '홍보맨'의 덕목으로 기업경영 전반에 관한 폭 넓은 식견을 바탕으로 변화하는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꼽는다.

SK에선 최근 SK텔레콤 기업문화실 전무에서 그룹 연수원인 'SK아카데미' 원장으로 승진한 이노종(55) 부사장이 독보적이다. 중앙대 출신으로 74년 고 최종현 회장이 선경합섬(현 SK케미칼) 홍보실을 만들 때 창설 멤버로 입사한 그는 30년 동안 홍보 외길을 달려왔다. 그 후임으로 SK 홍보 사령탑을 맡은 권오용(49) 기업문화실장(전무)은 전경련 기획홍보본부장과 금호그룹 비서실, KTB네트워크 전무 등을 거쳤다.

현대차그룹의 홍보와 마케팅을 맡았던 최한영(52) 부사장은 최근 그룹 사장에 발탁됐다. 국내 5대 그룹에서 홍보맨 출신이 본사 사장으로 승진한 것은 처음이다. 한양대 출신으로 82년 현대건설에 입사한 그는 93년부터 홍보팀장을 맡아 하루에 2∼3차례씩 저녁 약속자리를 옮길 만큼 온몸을 던져 일하는 성실성으로 정몽구 회장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롯데의 그룹 및 백화점 홍보를 함께 책임지는 장병수(53) 기업문화실장(상무)은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와 동아일보에서 요직을 두루 거친 후 2001년 초 홍보맨으로 길을 바꿨다. 유통업의 특성상 바람잘 날 없는 자리이지만 폭넓은 인맥과 특유의 뚝심으로 짧은 기간에 새로운 홍보 틀을 정착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포스코 윤석만(56) 부사장도 고참 CCO. 박태준 전 회장의 정치인 변신 등으로 정치 풍상을 유난히 많이 탔던 포스코 역사의 산증인으로 통하는 그는 어느 CCO보다 대인관계가 넓다. 2002년 중앙대에서 행정학 박사를 받은 학구파이기도 하다.

하루도 신문, 방송에 나오지 않는 날이 없을 만큼 언론 노출이 많은 기업으로 꼽히는 삼성전자의 홍보는 장일형(52) 전무와 김광태(49) 상무가 맡고 있다. 장 전무는 서울대상대를 졸업한 뒤 산업자원부에서 일하다 재계로 옮겨온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 연세대 수학과 출신인 김 상무는 삼성SDI에서 홍보를 시작했으며 연세대 대학원에서 광고홍보학 석사를 받기도 했다.

삼성전자와 라이벌인 LG전자의 김영수(53) 부사장도 가장 바쁜 CCO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연세대 경영학과 출신으로 기획력과 추진력이 뛰어난 홍보맨으로 통한다. 95년 그룹 회장실에서 LG그룹의 기업이미지통합(CI) 작업을 지휘하기도 했다. 삼성전자 김광태 상무와는 서울사대부고 선·후배로 사이로 매일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남다른 인연을 갖고 있다.

주요 그룹에 포진한 연세대 인맥 못지않게 중앙대 출신 인맥도 탄탄하다. 이들의 모임인 '중홍회'는 친목과 정보교류의 장으로 항상 북적댄다. 중홍회 인맥의 수장은 아남반도체 부사장을 지낸 김이환(신문방송학과 60학번) 한국광고주협회 상근 부회장. 또 SK그룹 CCO였던 이노종(신방 67) 부사장을 비롯해 포스코 윤석만(행정 67) 부사장, 태평양 이해선(경제 74) 전무, SK텔레콤 신영철(신방 75) 상무, 롯데그룹 최형(사진 72) 이사 등이 이 모임의 주축을 이룬다.

이외에도 동화약품 김응환(법학 63) 상무, LG증권 민광식(신방 72) 상무, 현대카드 김상욱(경제 72) 전무, 중외제약 박구서(신방 72) 상무, 한국마사회 조정기(신방 74) 홍보실장, 삼성SDS 한태신(신방 75) 부장등도 동문이다. 중앙대 출신이 홍보업계에서 이처럼 두각을 나타낸 이유는 1957년 국내 최초로 생긴 신문방송학과 출신 졸업생들이 홍보 분야로 대거 진출했기 때문. /박천호기자 toto@hk.co.kr

■드라마 후원에 사활건다

"홍보실이 뜨려면 자사 브랜드가 나오는 TV드라마를 띄워라."

다양해지는 홍보실 업무 중 PPL(Products in Placement)을 통한 회사알리기가 주요 업무로 급부상하고 있다. PPL이란 특정 기업의 제품이나 브랜드를 드라마 등에 자연스럽게 삽입시켜 광고효과를 극대화하는 간접광고의 일종. 기업 브랜드를 홍보하는 일인 만큼 대부분 홍보실 소관업무다. 특히 백화점 등 유통업체와 놀이공원의 경우 드라마 시청률이 고객들의 수요로 직결돼, 매출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자신들이 후원한 드라마의 성패여부에 사활을 건다.

PPL광고로 재미를 본 대표적인 회사는 애경백화점. 1994년 탤런트 차인표를 단번에 톱스타로 만들어준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안에'덕분에 당시 신생 백화점이라는 핸디캡을 순식간에 극복했다. 백화점측은 여주인공인 신애라를 자사모델로 기용, 드라마의 후광효과까지 독점했다. 당시 홍보실 관계자는 새벽까지 촬영현장을 지켜 드라마 제작진을 감동시켰다는 후문이다.

백화점 경영권을 둘러싼 암투를 코믹하게 그린 드라마 '줄리엣의 남자(2000)'는 분당 삼성플라자가 극중 배경이었다. 당시 제작진은 장소협찬에 대한 대가로 극중 백화점 이름을 원래 이름과 비슷하게 해달라는 홍보실측의 요청에 따라 '삼송플라자'로 표기했고, 그 이후 삼성플라자의 성가는 한층 높아졌다.

에버랜드도 최근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는 드라마 '백만송이 장미'와 장미축제를 연결시켜 톡톡한 재미를 보고 있다. 이에 앞서 드라마 '내사랑 팥쥐', 젊은이들의 짝짓기 프로그램인 '장미의 전쟁' 등 다양한 프로그램에 장소를 협찬하는 등 PPL을 통한 홍보에 적극적이다. 이용원 홍보팀장은 "PPL은 소비자를 현장으로 직접 불러들이는 효과가 커 최근 새로운 홍보컨셉으로 자리잡고 있다"며 "이 트렌드를 어떻게 잘 타느냐가 중요 과제"라고 전망했다.

롯데월드 홍보실측은 드라마 제작비의 일부를 지원하고 테마파크의 각종 시설을 드라마 속에 삽입시켜 엄청난 홍보효과를 거뒀다. 올해 초 큰 인기를 끈 드라마 '천국의 계단'에서 주인공 권상우, 최지우가 데이트를 즐겼던 회전목마, 천국의 벽화, 아이스링크는 모두 롯데월드 시설. 남기성 광고홍보과장은 "시청률이 올라가자 주인공을 따라 하려는 젊은 연인들의 발길이 이어졌다"며 "이 드라마가 일본, 대만 등에도 방영될 예정이어서 PPL효과가 외국으로까지 연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창만기자

■언론과의 전쟁? 풍경2

한때 PR(Public Relation)이라는 말이 '피'할 것은 피하고, '알'릴 것은 알린다는 우스개소리로 쓰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알릴 것만 알리는 것이 뜻대로만 되지는 않는다. 또 피하고 싶은 것이 언론에 대문짝만하게 보도될 때도 많다.

때문에 신문이나 방송을 상대해야 하는 홍보실 사람들은 하루하루가 피를 말리는 날의 연속이다. 언론과 홍보실은 때론 둘도 없는 동지이면서 때론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다. 둘 사이의 관계를 악어와 악어새로 비하하는 얘기도 있다. 오너의 심기를 살피며 기업홍보의 최일선에서 밤낮없이 뛰는 홍보실 사람들의 애환이 표출되는 곳으로 가보자.

광화문 가판대 저녁풍경

16일 오후 5시 서울 광화문 D신문사 앞. 양복에 넥타이를 맨 말쑥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하자 조용하던 거리가 갑자기 활기를 띤다. 꼟그룹 홍보실에서 7년째 근무중인 P대리에 이어 제약회사 홍보실 K대리, L과장 등도 속속 도착한다.

"오늘은 좀 일찍 나왔네." 이 곳 신문가판대를 23년째 지키고 있는 조모(43)씨가 이들을 반기자 서로 정겨운 인사를 나눈다. 17대 총선 드라마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선거가 끝났으니 이제 모두들 경제문제에 신경을 써야지"라는 K대리의 말에 L과장은 "기업이 정치판에만 휘둘리지 않는다면 살림살이는 훨씬 나아질 것"이라고 대꾸한다.

선배를 따라 이날 처음 이 곳에 온 꼢사 신입사원 A씨는 동종업계 타 회사 선배들에게 명함을 건네느라 정신이 없다. L과장은 "이곳에서만 10년을 넘게 본 홍보실 직원들이 적지 않다"며"대부분이 며칠에 한번씩 이 곳을 들르기 때문에 홍보실 직원끼리는 자연스럽게 안면을 트게 된다"고 말한다.

10분이 지나자 신문을 가득 실은 오토바이들이 속속 도착, 신문더미를 부려놓자 어디서 인지 넥타이부대들이 나타나 신문을 하나씩 들고 빠른 손놀림으로 들쳐본다. 매일 저녁 이 일대에서 볼 수 있는 진풍경이다.

가판은 신문사들이 다음날 배달될 신문을 시험용으로 미리 찍는 신문. 보통 오후 6시를 전후해 인쇄되는 종합일간지 가판은 지하철 퇴근길에 판매되거나 서울에서 먼 산간벽지로 배달된다. 하지만 가판신문이 가장 열심히 거래되는 곳은 바로 광화문앞이다.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업체 홍보실직원. 회사와 관련된 기사가 어떻게 신문에 게재됐는지를 확인하고 잘못되거나 마뜩찮은 부분이 있으면 해당언론과 담당기자를 상대로 '작전'이 시작된다.

청와대가 관공서에 "가판신문을 구독하지말라"고 지시하면서 부처 공보실직원은 사라졌지만 기업체 직원을 중심으로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여전히 저녁마다 이 곳을 찾는다. 아예 바닥에 퍼질고 앉아 신문을 넘기다 회사와 관련된 기사가 있으면 즉석에서 칼로 오려 스크랩하거나 메모를 한 뒤 전화로 회사에 보고를 한다. 기사의 내용에 따라 적절한 대응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촌각을 다투는 터라 노트북으로 기사내용을 메모, 무선데이터통신으로 전송하는 등 첨단장비까지 동원된다.

한 그룹 홍보실 관계자는 "매체가 많다 보니 빨리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꼼꼼하게 보지 않아 자칫 지나치는 기사가 생기면 다음날 호되게 당할 각오를 해야한다"고 하소연한다.

이 관계자는 "한때는 회사에 비판적인 내용을 실은 언론사에 기사를 빼달라고 요구하기 위한 수단이 강했던 것이 사실"이라며 "지금은 기사의 내용이 정확한지를 미리 알고 정정을 요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로 활용한다"고 귀띔했다. '인터넷으로도 가판신문 내용을 알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신문을 직접 보는 것이 아직은 익숙하다"며 "축구경기를 현장에서 직접 보는 것과 TV를 통해 보는 것은 아무래도 차이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이렇게 신문보기를 2시간. 오후 7시를 지나면서 기사내용을 회사에 전달하는 전화통화 소리도 어느새 멎었다. 왁자지껄하던 분위기는 금방 사라지고 사람들은 뿔뿔이 제 갈 길로 나선다. 저녁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대한축구협회 홍보팀의 하루

한국와 말레이시아의 올림픽 축구 예선전이 열렸던 지난 14일 오후 수원 월드컵경기장. 월드컵을 비롯, 국내 모든 축구대회의 홍보를 맡고 있는 대한축구협회 홍보국 소속 직원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 경기에서 승리하면 아테네 올림픽을 넉달 앞둔 시점에서 본선진출이 사실상 확정되는 중요한 순간. 2년전 한반도를 들끓게 했던 붉은 악마의 전설이 부활할 것인가에 국민적인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터였다.

이들의 임무는 선수들의 정보와 경기 상황을 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알려주는 일. 오전부터 이날 출장할 선수들에 대한 정보를 분석한 자료를 들고 경기장에 들어섰다. 본부석 4층에 마련된 기자실에 잠시 들른 L차장은 기자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눈다.

"요즘 한국팀이 최근 졸전을 거듭해 오늘 큰 점수로 이기지 못하면 내일 아침 신문에 좋은 기사 나기 힘들 것"이라는 모기자의 은근한 압력에 "오늘은 코칭스태프를 비롯한 선수들의 각오가 남다른 것 같으니 좀 잘 봐달라"며 너스레를 떤다.

오후 7시10분.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한국의 공격이 거세더니 2분만에 선제골을 넣는다. 분위기가 좋다. 그러나 전반 16분 올림픽 팀의 핵심공격수인 최성국이 말레이시아 선수의 팔꿈치에 턱을 가격 당해 쓰러지자 분위기가 갑자기 냉랭해졌다. 그가 들 것에 실려 나가자 기자들의 질문공세가 이어진다.

"어느 병원으로 실려갔어요?""지금 상태가 어떤가요?""다음경기에 지장은 없나요?"

L차장은 휴대 무전기로 수시로 의료팀과 연락을 취하면서 최성국의 상태를 파악하기에 여념이 없다. 느긋하게 경기를 보는 것은 이미 물건너갔다. 인근 아주대병원으로 간 최성국이 다시 영동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긴다는 내용을 전해들은 L차장은 S대리을 통해 수시로 기자실과 방송중계석에 내용을 전한다.

전반전이 끝나자 현재 상황을 전달하는 한편, 전반전 골득점 상황과 프리킥, 반칙 개수 등을 작성한 기록지를 기록원들로부터 받아와 전달한다. "중요한 경기일수록 각종 상황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언론에 알려줘야 시청자와 독자들이 제대로 된 정보를 얻게 됩니다."

최성국의 부상으로 풀리지 않던 경기는 후반23분 전재운이 들어오면서 활력을 띠기 시작한다. 결국 3대0 승리. 경기가 끝나자 L차장은 3골을 모두 어시스트한 최태욱을 비롯한 수훈갑들을 불러 모은다. 기자들과의 인터뷰를 위해서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어느덧 오후 11시를 훌쩍 넘었다. 그래도 이날 화끈한 승리로 내일 아침 기사내용이 좋을 것 같아 뿌듯하다. 기자실에 들르니 마감을 하지 않은 기자 몇몇이 눈에 띈다. 평소 술을 좋아하는 L기자와 함께 인근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잔 걸친 뒤 집으로 향한다. "오전부터 정신없이 바쁜 하루였지만 그래도 이런 맛이 홍보의 묘미죠." /한창만기자 cmhan@hk.co.kr

■잊지못할 나의 홍보담

하루에 수십통씩 전화를 돌리고 한 달이면 수십명의 사람을 만나야 하는 홍보실 사람들. 저마다 사연도 많고 할 말도 많기 마련이다. 다양한 분야와 경력을 가진 홍보 담당자들이 때로는 뿌듯하고 가끔은 황당한, 잊지 못할 홍보 경험담을 털어 놓았다.

"발음 좀 정확히 해주지"

엄소민(아미가 호텔 홍보담당)

작년 여름 호텔에서 '영어 완전정복'이라는 영화를 촬영하게 됐다. 꼬박 3일 밤낮을 새며 촬영을 진행하다 보니 '한번이라도 호텔 이름이 더 들어갔으면…' 하는 욕심이 생겼고 감독님도 감동하셨는지 로고를 크게 만들어 가져오라고 하셨다. 급하게 스티로폼 로고를 만들어 호텔 입구에 붙여 두고 그 앞에서 촬영이 진행하는 것을 흡족한 마음으로 확인한 후 안심했는데 나중에 영화를 보고 나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엉성한 로고가 어설프게 걸려 있는 것은 그렇다 치고 호텔에 처음 와본 것으로 설정된 아줌마 배우의 대사."애미가 호텔인지, 애비가 호텔인지…."

그 후로 친구들에게 '애미가 호텔'에 다니냐는 놀림을 받아야만 했다.

"앰뷸런스 필요하신 분"

좌호철(삼성서울병원 홍보담당)

작년 가을 강원 춘천에서 개최된 마라톤 대회에 앰뷸런스와 응급 의료헬기를 지원한 적이 있다.

앰뷸런스에 약제부와 자재과 등에서 지원받은 의약품 등을 싣고 '호반의 도시'에 도착, 선수 모습을 중계하기 위해 특별 제작된 모 방송국 차량과 맨 앞에서 출발을 기다렸다. 만나는 사진기자에게 "달리는 선수들 배경으로 앰뷸런스가 지나가면 정말 멋질 겁니다"라고 조언하고 출발하자마자 앰뷸런스 기사를 협박해서 선수단 바로 뒤, 방송차 바로 앞에 앰뷸런스를 붙여 최대한 많이 찍히도록 유도하며 즐거워했다.

그런데 얼마 안있어 코스관리 차량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멘트!"거기, 앰뷸런스, 좀 떨어져서 오세요!"

함께 지원 나갔던 응급헬기는 한술 더 떴다. 헬기 팀에 홍보 마인드가 있는 교수님이 한분 타셔서 통상 한번 정도 착륙예정지 주변을 돌던 것을 무려 네 번이나 돌게 한 것이다. 덕분에 헬기 밑면에 쓰여진 병원 이름이 카메라에 몇 번이나 잡히는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

"아저씨, 정말 그게 아니거든요"

신지혜(바이엘 레비트라 홍보담당)

홍보에 시간과 장소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성이 발기부전 치료제를 홍보하다 보니 재미있으면서도 당혹스런 경우가 적지않다. 그러다 보니 언제부턴가 성 문제에 대한 '개념'이 없어진 스스로를 발견하곤 한다.

얼마 전 택시를 타고 가는데 한 의학담당 기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평소 하던 것처럼 제품에 관한 설명에 열을 올렸다. "저희 제품이 다른 것에 비해 발기가 빨리 되고 발기된 성기의 단단함이 강하거든요. 그래서 성 관계 할 때 만족도가 훨씬 높고요. 기자님도 남자신데, 힘없이 오래 하는 게 좋으세요 강하고 짧게 하는 게 좋으세요?"

전화를 끊고 나니 기사 아저씨가 눈을 흘기며 한마디 하셨다. "쯧쯧…. 아무리 말세라지만 젊은 아가씨가 민망하게 그런 얘기를 하면 쓰나!"

민망해져 부랴부랴 내가 하는 일을 설명하고 나니 아저씨의 태도가 갑자기 달라졌다. "내 친구의 이야긴데…"라는 단서를 붙인 아저씨의 성 상담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 이런저런 질문에 답해드리고 나서 내릴 때 택시비 할인까지 받았다.

"새벽 두시, 그래도 촬영은 마쳐야 한다"

김상숙(롯데월드 홍보담당)

곧 개봉될 영화를 촬영할 때였다. 아이스링크에서 오후 11시부터 다음날 아침 8시까지 밤샘 촬영이 예정돼 있었는데 한달 전부터 관계자들과 점검에 점검을 거듭, 대관료도 두둑이 받고 현장 직원이 촬영 진행을 돕는 것을 확인한 후 퇴근했다.

오전 2시경. 한창 잠을 자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동시녹음을 해야 하는데 갑자기 현장에서 시끄러운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영화관계자의 항의였다. "100명 넘는 사람이 이거 찍으러 와 있는데 책임질 거냐", "손해 배상을 해라"….

시설관계자에게 급히 전화를 해서 잠시만 공사를 멈춰달라고 부탁을 했더니 이번엔 공사반장이 "인부들 비용은 어쩔 거냐", "비용 손실은 누가 떠맡을 거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새벽 3시, 한시간 걸려 택시를 타고 촬영 현장으로 가니 영화 관계자들과 현장 인부들의 불만이 나에게 쏟아졌다. 일일이 현장 공사 현장을 다니면서 휴대폰으로 공사 시간과 영화 찍는 시간을 맞춰가며 간신히 촬영을 마쳤다.

그날 아침 현장 관계자들에게 해장국과 소주를 사며 "아, 도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걸까"라는 생각을 했다.

/김신영기자 ddalg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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