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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공동善 지킴이 서영훈 <24> 흥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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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공동善 지킴이 서영훈 <24> 흥사단 이사장

입력
2004.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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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10월 노련한 외교관 출신인 김용식(金溶植) 전 외무장관이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취임하게 됐다. 나는 6개월간 김 총재와 같이 근무했으나 B형 간염에 걸려 계속 근무가 어렵다고 판단, 사표를 제출하고 30년간 일해온 적십자사를 물러나게 됐다. 물론 정년은 없지만 이미 나이도 60세가 됐고 건강이 나빠져 업무수행이 어려웠다. 나는 적십자 병원에 입원해 2개월 가까이 치료를 받고 건강을 회복했다. 김 총재께서는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그 능력과 수완을 충분히 발휘해보지 못하고 1년 만에 총재직을 물러나 아쉬움을 남겼다.퇴원 이후 약 3, 4개월을 집에서 조용히 휴양하고 있는데 편안할 팔자가 못돼 그런지 흥사단에서 나를 이사장으로 선출하고, 취임을 요청했다. 흥사단은 1913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근처 리버사이드란 곳에서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이 민족 부흥의 지도자가 될 청년을 양성하기 위해 만든 수양단체요, 독립운동단체이다. 해방 후 본부를 본국으로 옮겨 온 이후 김윤경(金允經) 장리욱(張利郁) 이용설(李容卨) 주요한(朱耀翰) 최희송(崔熙松) 박사 등 저명한 지도자들이 이사장으로 운동을 이끌어왔는데 나에게는 힘에 겹고 분에 넘치는 임무여서 처음에는 사양했다.

흥사단은 당시 젊은 단원과 선배 노령층 단원 간에 운동 방향이나 방식을 둘러싼 이견이 많아 갈등을 빚고 있던 때라 청소년운동과 적십자운동에 경험이 많은 나를 본부 책임의 적임자로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본래 적십자에 있을 때 일체 다른 단체에 가입하지 않았고, 특히 정치성을 띤 운동에는 관계하지 않기로 결심했었다. 그런데 마침 따님이 적십자 국제대표에 뽑히는 인연으로 자주 뵙게 된 주요한 선생, 사상계 주간으로 계실 때부터 알던 안병욱(安秉煜) 선생이 권해서 66년에 단우가 됐고, 그 후에 이사회 위원으로 참여했으나 이렇다 할 역할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용설, 최희송, 주요한 박사 등이 나를 평가해줬고 흥사단 아카데미 소속 젊은이들 중 가까운 이들이 많이 있어 노령층과 젊은 층이 나를 모두 환영했다. 그리하여 나는 83년 1월1일부터 흥사단 이사장으로 동숭동 흥사단 본부에 출근하게 됐다.

일단 이사장에 취임한 후 맡은 일은 열심히 하는 내 습성대로 흥사단을 위해 임무수행에 진력했다. 흥사단도 오래된 단체라 파벌까지는 아니라도 인맥을 달리한 그룹들 간에, 특히 세대 간에 갈등이 있었다. 나는 이들을 화합 시키기 위하여 노력했으며 노장층 세대가 기피했던 사회참여를 정치적 파벌성을 띄지않는 범위 내에서 선별하여 추진하도록 힘썼다. 마침 취임하던 해가 흥사단 창립 70주년이라 기념행사를 갖고 70년사도 발간했으며, 기관지 '기러기'도 내용의 수준을 높여 유가지로 보급하기 시작했다.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의 위압정치 하에 야당이나 비판적 시민단체가 집회장소를 못 구해 애쓰던 때 나는 흥사단의 구강당(약 500명 수용)을 개방해 민주화운동, 시민운동의 장으로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 때 민청련, 평민당, 신공화당, 그리고 기독교 청년단체 등이 날마다 흥사단 강당에서 모임을 열었다. 그 주변은 전에 서울대 자리였고, 유력한 인사들의 자택도 많은지라 소란하다고 항의가 많았다. 그러나 나는 집회 주최자들과 '옥외에서 데모는 절대 안하고 소란은 피우지 않는다'는 서약을 받고 계속해서 장소를 빌려주었다. 안기부나 경찰에서 걱정을 했으나 그들에게도 나는 "대한민국에서 장소를 구하지 못해 정당과 사회단체가 집회도 마음대로 열 수 없다면 지하단체가 될 수 밖에 없지 않은가"라고 하여 묵인 받았다.

그때 평민당을 창당한 김대중(金大中) 총재도 내 방에 들러 고마움을 표시했고 문익환(文益煥) 김근태(金槿泰) 장영달(張永達)씨 등 민주화운동을 이끈 많은 인사들을 알게 됐다. 그러나 나는 그 운동의 표면에 나서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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