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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포츠 50년]그때 그사람/前 테니스 국가대표 이 덕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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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포츠 50년]그때 그사람/前 테니스 국가대표 이 덕 희

입력
2004.04.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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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년 4월 미국의 힐튼 헤드 테니스 대회 2회전. 마치 깜장콩 같은 조그만 동양선수가 무적의 여왕 크리스 에버트와 맞붙어 사력을 다했지만 한 게임을 따내는 것 조차 역부족이었다. 0-6, 0-6의 참패. 세계 1위와의 대결만도 영광이라고 자위해야 했던 그는 운동선수의 해외 진출이 전무하다시피 하던 때 단신으로 프로무대에 뛰어 들었던 '집시' 이덕희(51). 74 아시안게임 단체전, 78 아시안게임 단식과 복식을 석권한 후 "내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테스트 해 보고 싶다"며 당차게 미국으로 건너갔던 그는 이렇듯 높은 벽에 좌절 않고 결국 세계 34위까지 오른 한국 테니스 전설의 주인공이다.

79년부터 83년까지 4년간 세계를 돌며 15차례 그랜드슬램 대회에 참가하고, US오픈에서는 81년 16강(4회전)과 82년 3회전 진출을 이뤘으며, 한 차례 투어대회 우승도 기록했다. 투어 대회 우승과 그랜드슬램 16강은 20년이 지나 이형택에 의해 재연됐다.

82년에는 비록 쇠퇴기에 접어 들었지만 한동안 여자 테니스계의 지존이었던 빌리 진 킹을 깼고, 그랜드슬램대회 3차례 우승자인 전 세계 2위 버지니아 웨이드와 프랑스오픈 챔피언을 지낸 버지니아 루치치를 꺾기도 했다.

"옛날에는 아시안게임 우승이 한국 스포츠계의 지상목표였잖아요. 대한체육회가 78년 아시안게임에 나가지 않으면 해외 진출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만 26세에 뜻을 이룰 수 있었어요." 그는 몇 년만 일찍 도전했어도 좀 좋은 성적을 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지금까지 갖고 있다. 이것이 매년 1억원을 들여 국내 유망주들에게 해외진출의 발판을 마련해 주기 위한 국제주니어대회를 여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난 주에는 올림픽공원에서 4번째 대회를 개최했다.

그는 83년 은퇴 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해 사업을 시작, 100년 전통의 와인체인점 '벤덤'을 베버리힐스등 부촌에서 다섯 개나 운영하다가 90년부터 한인타운의 호텔 '가든 스위트'를 경영하고 있다.

팬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던 이덕희라는 이름은 수년 전 김대중대통령의 일산 자택을 인수한 재미동포 무기중개상 조풍언씨의 아내로서 언론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그는 남편에 대해 "운동선수를 이해하고, 열심히 운동을 한 사람이 집안에서 살림만 하고 있지는 못할 것이라며 나에게 맞는 일을 찾아 주려 애썼다"며 결국 선수시절 각국의 호텔을 돌아 다니다 보니 호텔이 익숙해 이쪽 사업을 벌이게 됐다고 설명.

"미국생활이 다 그렇듯이 사업하랴, 가을에 대학에 들어가는 딸과 고등학생 아들의 뒷바라지 하느라 정말 바쁘게 살았어요. 테니스 라켓도 은퇴 후 20년 가까이 만지지 않다가 얼마 전부터 다시 시작해 이제 레슨도 받고 있어요."

"테니스가 아니면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없었겠지요. 그 동안 받은 것을 리턴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던 중 계기가 마련 돼 주니어 대회를 만들었는데 아주 보람이 있어요."

이번 대회에는 7개국 선수가 나왔는데 3년 전 실력은 모자라지만 장래성이 인정돼 와일드 카드로 출전했던 중학생 김선용(양명고) 전웅선(SMI아카데미)이 놀라운 실력향상을 보이며 결승까지 진출해 너무 기뻤다고.

전북 남원여중에서 체육교사의 권유로 테니스 채를 잡았던 그는 서울 중앙여중에 스카우트 된 후 중앙여고 성균관대를 거치며 70년대 최고의 스타로 명성을 날렸다.

와일드한 이미지가 싫어 체육과를 안 가고 대학에서 가정관리학과를 택했을 정도로 여성스러운 성격이었지만 미국에 가서는 영어수업과 운동을 병행하며 매 주말 지역대회에 나가 프로대회 참가를 위한 포인트를 쌓고, 비용을 절약하느라 한번 이동하면 연속 대회에 나가 한 해에 30개가 훨씬 넘는 대회에 출전할 만큼 악착 같은 모습을 보였다.

그는 테니스 선수의 조기교육을 강조하면서도 지금과 같이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한참 성장해야 할 나이에 학교수업도 포기한 채 오직 눈앞의 승리를 위해 혹독한 훈련을 받는 것은 비정상적이라며 보다 효율적인 훈련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1967년 4월 22일/박신자 활약, 농구 2위 "세계가 놀랐다"

공산국가 입국은 커녕 빨간색만 보아도 몸이 움츠러들던 시절. 일본 주재 체코 대사관의 비자발급이 늦어져 대회 개막에 임박해 프라하에 도착한 한국선수단은 가는 곳 마다 북한 대사관 직원들의 미행을 받고, 기자회견장에서 '한국의 얼굴'이라는 홍보책자를 돌렸다가 선수단장이 정치 선전을 했다는 이유로 추방까지 당하는 살벌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더욱이 동구 선수들의 큰 키는 우물 안 개구리였던 한국 선수들을 바짝 긴장시켰다. 그럼에도 평균 170㎝가 채 안 되는 최단신의 한국은 당당히 은메달을 획득했다.

11개국이 출전한 대회에서 한국은 예선서 2승으로 조 1위를 한 후 결승리그에서 동독 일본 유고를 눌렀으나 202㎝의 마녀를 앞세운 평균 190㎝의 소련에는 50-83으로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176㎝의 국내 최장신 박신자(27· 상업은행)가 소련선수들을 제치고 최우수선수상을 받을 만큼 인상적인 플레이를 펼쳤으며 김추자 신항대 김명자(이상 상업은행) 주희봉 임순화 이혜숙(이상 제일은행) 등이 큰 활약을 했다.

한편 대표선수를 똑같이 5명씩 보유한 라이벌 상업은행과 제일은행은 선수단 개선 후 남대문로를 두고 마주보는 본점에서 같은 시간에 인기 가수들을 출연시키고 경쟁적으로 VIP를 초대한 가운데 성대한 환영회를 개최, 화제를 만들기도 했다.

최대 고비는 홈팀 체코와의 경기. 전반을 34-34 동점으로 마치고 경기 종료 3분여 전 박신자가 5반칙으로 퇴장 당하는 위기를 맞은 한국은 결국 7초를 남기고 김추자가 상대의 볼을 가로채 질풍같이 파고들며 슛을 성공, 1점차의 극적 역전승을 거두었다.

준우승 후 그 해에 은퇴한 박신자는 신용보증기금 감독과 88올림픽조직위 농구경기 담당관을 역임했다.

■1991년 4월 29일/하나된 남북탁구 만리장성 넘어

분단 46년 만에, 63년 남북 체육회담이 시작된 이후 28년 만의 결실로 구성된 남북한 최초의 단일팀이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일본 지바)에 출전했다.

흰색 바탕에 하늘색 한반도 지도의 단기를 들고, 1920년대 아리랑을 단가로 한 '코리아' 팀은 남북 각 11명, 총 22명의 선수를 포함한 56명으로 구성됐다.

일본 현지에서 한 달간 합동훈련을 한 어린 선수들은 스스럼 없이 어울리며 단일팀 구성의 의의를 확인시키고 금 1, 은 1, 동 2개의 성적을 거두었다. 여자 단체전에서 8연패하던 중국을 남북 합작으로 꺾은 것은 최대의 수확이었다.

남쪽의 에이스 현정화가 단식에서 1승1패를 하고, 북의 이분희와 짝을 이룬 복식도 졌지만 북쪽의 다크호스 유순복이 첫 단식서 덩야핑을, 마지막 단식서 가오준을 누르는 수훈을 세워 3-2의 극적 승리를 거두었다.

■1983년 4월 17일/첫 천하장사… 이만기시대 열어

프로복싱이 전국민을 열광시켜도 우리 민속경기인 씨름의 프로화는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82년 프로야구 프로축구의 출범에 이어 83년 프로의 모습으로 탄생한 민속씨름은 개막 첫날 장충체육관에 입추의 여지없이 8,000여명의 관중이 몰릴 정도로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첫 천하장사 타이틀을 차지한 이만기(20·경남대)의 등장은 더욱 극적이었다. 이만기는 182㎝의 크지 않은 체구에 이 대회 직전 열린 대통령기 대회 장사부 3위가 최고의 성적였다.

당시 씨름계의 거물은 홍현욱(26·182㎝ 95㎏) 이준희 (26·182㎝ 100㎏) 최욱진(22·172㎝ 95㎏) 이봉걸(26·205㎝ 115㎏).

그러나 약관의 이만기는 절묘한 기술로 모래판에 회오리를 일으켰다. 전날 한라장사급 결승서 최욱진에 져 2위에 그쳤지만 천하장사대회에서는 준결승서 이준희를 2-1, 결승서 최욱진을 3-2로 눌러 단번에 1,500만원의 상금을 챙겼다.

뛰어난 유연성과 순발력에 들배지기와 호미걸이가 특기인 이만기는 8년간 모두 10차례나 천하장사에 등극하며 한국 씨름의 대명사가 됐으며 2001년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인제대교수로 재직중 17대 총선에 열린우리당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유석근 편집위원sk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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