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20일 유럽연합(EU) 헌법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BBC 등 현지 언론은 '최대의 도박' '승부수'라고 평가하며 이라크 전쟁 등으로 국내에서 수세에 몰렸던 블레어 총리가 정치적 생명을 걸고 모험에 나섰다고 분석했다.블레어 총리는 그 동안 "EU 헌법은 국가간에 체결된 기존 협정과 조약을 일원화하는 것일 뿐 EU와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국민투표를 실시할 필요는 없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영국 국민 대다수가 EU 헌법에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섣불리 국민투표에 부칠 수 없는 속사정도 있었다. 반면 보수당 등 야당은 "EU 헌법 제정이 EU의 권한을 지나치게 확대해 헌법에 보장된 국민들의 주권을 침해할 것인 만큼 이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를 실시해야 한다"며 블레어 총리를 압박해왔다.
블레어 총리는 국민투표 실시 요구를 수용했지만 그 시기를 최대한 늦추려고 하고 있다. 그가 국민투표를 즉시 치르는 것이 아니라 "우선 의회가 논의한 뒤 국민이 결정하도록 할 것"이라고 밝힌 것은 이런 의도를 잘 보여준다. BBC는 "국민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 분명한 상황에서 노동당 의원들은 논의를 최대한 지연시킬 가능성이 높다"며 "국민투표는 2005년 5월 총선 이후 실시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블레어 총리가 국민투표를 늦추려는 것은 내년 총선에의 영향을 고려한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이다. 패배할 가능성이 높은 국민투표 결과가 내년 총선에 반영, 소속 정당인 노동당의 재집권에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얘기다. 총선 전에 국민투표에서 EU 헌법에 반대하는 결과가 나올 경우 블레어 총리의 정치적 생명에 사망선고나 다름없을 것이라고 현지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또 EU 헌법이 총선에서 주요 쟁점이 되면 여당에 불리하게 작용할 대 이라크 정책에 대한 논란을 희석시킬 수 있다는 기대도 하는 것 같다.
블레어 정부는 일단 재집권에 성공한 뒤 국민투표에서 패배하더라도 국민들의 의견에 따르는 유연한 지도자의 모습을 보이면 된다는 계산을 했을 수도 있다. 잭 스트로 외무장관이 20일 "국민투표 결과가 반대로 나오더라도 블레어 총리가 꼭 사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고 밝힌 것은 이를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영국의 국민투표가 EU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클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로이터 통신은 블레어의 선택이 EU 헌법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독일 국제안보연구소 안드리아스 모레르 박사는 "실패할 가능성이 많은 영국의 국민투표 실시는 독일 등 다른 EU 가입국에서도 국민투표 요구를 높여 EU 헌법 제정 시도를 좌초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김이경기자 moonligh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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