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봄을 흔히 '서울의 봄'이라고 부른다. 그 전해 10월26일 박정희가 살해된 뒤 계엄령 아래서도 민주주의의 서광이 비치는 듯했기 때문이다. 사실은 12월12일 전두환·노태우가 유혈 반란을 통해 군부를 장악한 순간 서울의 봄은 유산됐다고 봐야겠지만, 사람들은 그래도 가느다란 희망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 봄볕이 길지 않으리라는 조짐은 여기저기서 보였다. 이른바 사북사태의 처리 방식도 그랬다.1980년 4월21일 국내 최대의 민영 탄광인 강원도 동원 탄좌 사북 영업소에서 광부들과 경찰이 충돌하면서 노동자 폭동이 일어났다. 사북은 노동자 대표와 정부측 대책위원들 사이의 협상이 타결된 24일 오전까지 광부들의 통제 아래 놓였다. 탄광촌 분위기는 어용 노조 지부장 이재기가 회사측과 20%의 임금 인상에 합의했다는 사실이 확인된 15일부터 술렁이기 시작했다. 당시 광산노조는 전체 지부장 회의를 통해 임금 인상폭을 42.75%로 잡아놓은 터였다. 이재기는 자신에게 자재 납품권, 식당 운영권 같은 특혜를 베풀어온 회사측에 임금 소폭 인상 합의로 보은한 셈이었다. 노조 지부장의 이런 배신 행위는 열악한 노동·주거 환경 속에서 최저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받아온 노동자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이재기와의 면담 과정에서 경찰이 노동자 대표를 연행하고 노골적으로 회사와 지부장을 편듦으로써 사태가 악화되었다.
나흘간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정부측과의 협상에서 노조집행부 사퇴와 상여금 인상을 빼고는 얻은 것이 없었다. 더구나 관련자를 처벌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합의문에 들어있었는데도, 합동수사본부는 70여명의 광부와 가족을 연행해 혹독한 고문 수사를 벌인 뒤 그 가운데 25명을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그 해 5월의 전국적 학생 시위 이전에 서울의 봄은 이미 이울고 있었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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