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VD에서 한글이 수난을 겪고 있다. 기본적으로 문장이 성립되지 않는 비문과 맞춤법이 틀린 표기, 엉뚱하게 해석하거나 원문을 건너뛰는 엉성한 번역 등 부실한 한글 자막이 수두룩하다."두 번째 파상공격을 독으로 가져옵니다." "자네가 확신한다니 위로이군." 2차 세계대전을 다룬 영화 '미드웨이' DVD의 한글 자막이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다.
뒤죽박죽된 단어 배열로 문장 성립이 안되기 때문이다. 바로 쓰면 "두 번째 파상공격은 독이 됩니다." "자네가 확신한다니 위로가 되는군"이 맞다. 이 DVD뿐만 아니라, 비문으로 얼룩진 타이틀은 일일이 꼽기 힘들 만큼 많다.
더욱 심각한 것은 맞춤법조차 제대로 못 지킨 자막들. 얼마 전 나온 스릴러 '베이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밝혀"를 "발켜"로, "이었어"를 "이였어"로 써 초등학생 받아쓰기 수준만도 못한 한글 자막을 선보였다. 애니메이션 '원더풀 데이즈 확장판'도 "바퀴"를 "바뀌"로, "금지돼"를 "금지되"로 표기해 기본적인 "돼"와 "되"의 쓰임조차 구분하지 못했다.
인터넷 채팅에서나 볼 수 있는 임의의 줄임말들이 마구 쓰이는 것도 문제. 아무 생각없이 사용한 줄임말, 속어, 은어 등이 우리말을 오염시키고 있다. "그치?"(캐치 미 이프 유 캔), "너흴"(스카페이스) 등이 대표적인 경우. 이쯤되면 오·탈자는 애교에 속한다.
부실 번역은 영화 보는 재미를 깨뜨릴 뿐만 아니라 내용까지 바꿔 놓는다. 다큐멘터리 '볼링 포 콜럼바인'은 한글 자막에 "미국이 파나마를 침공해 노리에가를 제거했다.(U.S. invades Panama and removes Noriega)"를 "노리에가가 파나마를 침공했다"고 번역했다.
'닉슨 SE'는 미 해병 장성 출신의 중앙정보국(CIA) 부국장을 대령 계급의 해군 총사령관이라고 적어 놓았다. 번역자의 전문지식이 부족한 탓이다. "어뢰"를 "수뢰"(미드웨이)로, "포도주 2병"을 "포도주 2대롱"(길)으로 표기한 것도 매끄럽지 못한 번역.
번역에 자신이 없었던지, 한국인의 영어 실력을 과신했는지 모르겠지만 아예 대사를 번역하지 않고 통째로 건너뛴 경우도 있다. '에이리언 박스세트'의 경우 상당 부분의 대사를 번역하지 않아, 출시사인 20세기폭스코리아가 소비자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 DVD 제작사에서 자막 번역 및 점검에 공을 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워너, 콜럼비아, 20세기폭스, 유니버셜, 파라마운트 등 국내에 들어온 외국 DVD제작사들은 출시 DVD 가운데 대부분 타이틀의 한글 자막을 미국 본사에서 만든다.
세계적으로 출시일을 맞추기 위해서 미국 본사에서 세계 각국 언어의 번역작업을 직접 하다 보니, 제대로 된 자막이 나올 리가 없다. 이렇게 제작된 한글자막은 국내 지사에서 확인과정을 거쳐 오류를 찾아내도 수정이 어렵다. 자막 수정에 적지 않은 돈이 들기 때문이다.
또 국내 DVD 시장의 규모가 작다 보니, 미국 본사에서 의도적으로 자막 수정 요청을 무시하는 경향도 있다.
국내에서 자막 번역작업을 하는 국내 DVD 제작사들의 사정도 비슷하다. 이들은 번역자의 수준에 따라 분당 4,000∼6,000원의 번역료를 주고 맡긴다.
번역이 끝나면 내부 직원이나 외주 업체에서 점검을 하지만 제대로 걸러지지 않는다. DVD제작사인 스펙트럼디브이디의 한정환 마케팅 과장은 "명품 DVD를 만드는 제작사로 유명한 미국 크라이테리온사는 번역과 자막 글자체까지 꼼꼼히 챙긴다"며 "국내 DVD시장 규모를 키우려면 제작사들도 자막에 정성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연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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