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11월25일 남북적십자사 4차 회담이 서울에서 끝난 후 퇴근해 창동의 집에 돌아갔는데 대한적십자사 본사에서 전화가 왔다. 중요한 일이라고 해 택시를 타고 가보니 직원들이 축하한다고 했다. 내가 사무총장이 됐다고 하는 것이었다. 놀리지 말라고 하고 총재실로 가니 김용우(金用雨) 총재께서 "서 부장을 사무총장으로 중앙위원회에서 선출하였소"라고 했다. 나는 너무나 뜻밖이어서 "내가 어떻게 사무총장이 될 수 있습니까. 부장이 6명인데 순위로 봐도 나는 끝이고, 전부 나보다 선배들인데다 미국 유학 박사도 있지 않습니까.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옆 건물의 남북적십자회담사무국의 이범석(李範錫) 수석대표가 좀 보자고 해 가보니 "모두 서 부장이 사무총장 되는 걸 찬성했으니 사양말고 잘 해달라"면서 "서 부장이 안 하면 군인들이 올 것이니 절대로 당신이 사무총장을 해야 한다"고 했다. 새로 부총재가 된 김학묵(金學默) 전 사무총장과 다른 부장들도 같은 말을 했다.그 무렵 한적은 사업이 활발했고 남북적십자 회담도 진행 중이라 사무총장 운동을 하는 사람이 많다는 소문이 있었다. 다음 날 나는 김 총재에게 "밖에서 무슨 소리를 해도 나를 믿어주어야 한다"고 강조했고 김 총재는 "절대로 약속한다"고 답했다. 그래서 나는 한적 사무총장을 맡았다. 72년 8월에 퇴임한 전임 최두선(崔斗善) 총재는 그 해 멕시코 세계적십자총회에 사무총장 대신 윤여훈(尹汝訓) 국제부장과 나를 보낸 일이 있는데 아마도 그때부터 내가 사무총장감으로 인정을 받은 것 같았다.
경험도, 학식도 부족한 사람이 사무총장을 맡아 세 분 총재 밑에서 꼭 10년을 열심히 일했다. 적십자 사훈, 복무공약을 만들고 전국적으로 청·장년 봉사회를 강화했으며, 적십자 연수원과 혼혈아직업훈련소, 국제인도법연구소를 신설하는 등 새로운 사업을 많이 개척했다. 72년 6월 유엔인간환경회의에서 지구환경보호를 위해 전세계가 협력할 것을 약속하는 '스톡홀름 선언'이 채택됐다. 국내에서는 한적이 앞장서서 환경보호운동에 나서게 됐다. 공업화 정책을 강하게 추진하던 정부는 이를 싫어했다. 그때 적십자 연수원에서 2년간 공해를 발생시키는 각 제조업체 관계자들을 상대로 1주간씩 환경보호 연수를 시켰다. 권숙표(權肅杓) 박사, 노융희(盧隆熙) 박사 등이 그 주역이였다. '자연은 사람보호 사람은 자연보호'라는 표어도 현상 공모하여 널리 보급했다.
헌혈운동도 72년부터 시작했다. 한양대 김기홍(金箕洪), 서울대 김상인(金相仁), 순천향대병원 강득용(姜得龍), 연세대 이삼열(李三悅) 교수와 적십자혈액원장 원종덕(元鍾德) 박사 등이 전문가로서 헌혈운동에 앞장섰고 적십자사를 도왔다. 정부는 아예 헌혈사업을 82년부터 한적에 위임했다.
사무총장 시절 감사원 감사를 두세 번 당한 적이 있다. 동아일보 사장을 겸임했던 최두선 전 총재는 명망이 높아 한적에 큰 덕이 됐다. 매우 청렴하고 절약정신이 강해 조그만 집무실을 부총재 두 분과 같이 썼다. 비서도 따로 두지 않았다. 그런데 후임 김용우 총재는 사회봉사활동을 많이 해 스타일이 달랐다. 총재실을 4배쯤 큰 방으로 옮기고 비서를 3명이나 뒀다. 그러자 최 총재와 가깝던 적십자사 부녀자문위원 등이 청와대에 투서를 넣었다. 전임 총재가 아껴 저축한 돈을 김 총재가 막 쓴다는 것이었다. 감사원의 신두영(申斗泳) 사무총장이 오라고 해 갔더니 과장에게 브리핑을 시켜 감사 내용을 다 들려주었다. 김 총재가 해외여행갈 때 적십자병원에서 여비를 도움 받았고, 청소년자문위원 회의를 할 때 자문위원 들에게 교통비 3,000원씩 주는 대신 저녁식사를 같이 했는데 교통비를 받은 것처럼 가짜 사인을 한 것이 걸렸다. 브리핑 차트 마지막 장에 있던 투서 내용도 보았다. 그는 "누구라도 최두선씨 같은 분의 후임을 하면 그런 소리를 듣게 될 것"이라면서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했다. 두분 총재 모두 훌륭했지만 최 총재가 워낙 검소하다 보니 그런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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