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선거는 역대 총선 중에서 가장 큰 변화를 몰고 왔다. 우선 3김 시대의 완전한 종언과 보수 야당의 몰락이 가장 눈에 띈다. 16대 의원 중 살아 돌아온 사람은 절반에도 못 미치고, 당선자 중 30대와 40대를 합치면 17대 국회의 절반 정도가 된다. 계급정당을 표방한 민주노동당이 최초로 원내에 진출했을 뿐만 아니라 제3당으로 우뚝 섰다. 여대야소가 되기도 문민정권 이후 처음일뿐더러 더 나아가 여당은 과반수를 차지했다. 이제 이러한 변화의 의미를 되새겨보자.가장 중요한 의미는 이제 변명의 여지가 없는 책임정치의 발판이 마련되었다는 점이다. 그동안 이 나라 집권세력은 실제 존재하는 것 이상의 '외인구단 콤플렉스'에 시달려 왔다. 정권을 잡기는 했지만 기득권 세력인 '그들'은 결코 '우리'를 인정하지 않고 사사건건 발목을 잡으려 한다는 멘탈리티를 말한다. 이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사실이지만 집권세력의 엄살은 지나친 면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그들'을 탓하게 되고, 이것은 국민을 불안하게 했다.
탄핵 후폭풍은 사실상 이러한 '남의 탓'의 백미였다. 야당이 엄청난 자살골을 넣어주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압승은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다. 행정부와 국회를 동시에 장악하고, 방송과 인터넷 매체 등이 대부분 우군이며, 거기에 촛불집회를 통해 나타난 일반 국민의 지원까지 받은 정권은 건국 이래 단 한번도 없었다. 이제는 자신 있게 정책을 통해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
선거를 뒤덮은 '뒤돌아보기'식 캠페인에 대해서도 진지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 이번 선거는 미래를 내다보는 선거가 아니라 과거를 뒤돌아보는 선거가 되었다. 모든 당이 다 마찬가지이지만 국회를 장악하게 된 우리당의 경우만 예로 들어보자. 노인 폄하 발언과 박근혜 효과로 인해 아무리 초조했다 하더라도 여당의 의장이 공공연하게 '탄핵 심판이 이번 선거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며 단식을 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자신들의 미래지향적 정책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있었던 남의 잘못을 심판하는 것이 총선의 본질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상대적으로 정책 위주의 선거를 치른 민주노동당으로부터 '길 가다 지갑 주웠으면 경찰서에 갖다 주라'는 조롱을 받아야 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희망을 걸 수 있는 변화들도 있다. 3김 시대의 완전한 종언과 정치인의 세대교체는 이제 더 이상 맹주 정치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17대 국회의 초선 의원 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많다. 패거리 정치에 동화되지 않으려는 정치 신인들 스스로의 노력이 뿌리내리기에 가장 좋은 여건이 만들어진 셈이다. 개혁―보수―진보의 3당 구도로 짜여진 17대 국회에서는 과거와 같은 백화점식 정당으로는 배겨내기 어려울 것이다.
한나라당은 그들이 추구하는 보수의 원칙을 분명하게 천명하고, 갈 곳 없어 방황하는 보수층 유권자들을 대변해야 한다. 유권자의 세대 변화 및 행태 변화를 감안할 때 현재 상태로는 향후 선거에서도 전망이 없고, 그렇게 될 경우 이 나라의 보수 정당은 보수층 유권자를 크게 배신하게 될 것이다.
민노당의 등장은 서민층을 대변하는 세력의 원내 진출이라는 원론적 의미 이외에도 여당의 '이미지 정치'에 확실한 한계를 그어준다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과거에는 뚜렷한 정책이나 정체성이 없이 보수 정당을 비판하고 내용이 분명치 않은 개혁을 외치는 것으로 정치적 지분 확보가 가능했으나 이제는 보수 정당의 정반대편에 민노당이 존재함으로써 여당의 운신 공간은 일정 부분 줄어들게 될 것이다. 뚜렷한 정책으로 승부해야 할 압력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다.
이제 이벤트는 끝났다. 반성을 통해 희망을 가지고 이미지 싸움이 차지했던 자리를 정책 경쟁이 채우는 건강한 17대 국회가 되기를 바란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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