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대 총선의 결과는 보혁세력의 교체일까, 또는 주력 세대가 이행하고 변한 것일까. 한국정치의 흐름을 천착해온 서강대 손호철 교수와 고려대 김병국 교수의 진단을 지면을 통해 정리해 보았다./편집자주
■ 총선 결과와 의미
손호철=이번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수 의석을 근소하게 넘었고 한나라당은 개헌 저지선을 확보해 견제가 가능해졌다. 민간 정부 출범이후 처음으로 여대야소가 됐다.
우리 정치 구조는 1987년 이후 다당제가 자리잡으면서 입법 권력과 행정권력이 분리되는 분점 정부가 일상화했다. 인위적 정계개편으로 여당이 다수 의석을 가진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총선 결과로는 처음이다. 결국 입법권과 행정권을 동시에 장악한 통합정부가 생겨났다.
김병국=이번 총선의 가장 큰 의미는 전후 세대가 정치의 전면에 나선 것이다. 이들의 등장으로 정치의 문화적 코드가 달라졌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통용되는 계급적, 이데올로기적 개념의 진보, 보수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문화에 있어서의 진보, 보수로 이해해야 한다. 또 책임정치의 기회가 마련됐다. 지금까지는 소수파인 대통령이 한나라당 주도의 국회에 발목 잡혀 자신의 이념을 정책에 반영할 수 없었다는 논리가 성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젠 노무현 대통령이 입법부까지 장악, 책임정치의 기회가 마련된 것으로 해석된다.
손=중요한 지적이다. 냉전적 보수세력과 개혁적 보수세력, 그리고 진보세력이라는 이념적 3분 구도로 변화했다는 점이 이번 총선의 의미다. 이는 전후 세대가 다수가 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변화다. 자민련, 민주당 등 3김 정당의 역사적 사망 선고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또 세대보다는 세력 교체의 의미가 크다. 우리 정치는 한나라 자민련 중심의 냉전 보수 세력과 양김 중심의 개혁 보수 세력이 경쟁하는 구도였다. 그간 대선에서는 늘 개혁 보수 세력이 승리했지만 총선에선 지역주의 세력이 국회의 55%를 쥐는 구도를 가졌다.
탄핵사태로 이 구조가 와해됐다. 개혁 보수 세력인 우리당이 과반을 차지했고 전통적 의미의 진보 정당인 민주노동당이 제3당을 차지했다. 냉전 보수 세력도 의미 있는 위치를 차지했다.
김=진보세력은 전통적 정치 이념으로 볼 때 정체성이 비교적 분명하다. 그러나 개혁 보수와 냉전 보수는 세력이라고 하기에는 이질성이 두드러진다. 한나라당 후보 중 상당수는 개혁에 무게 중심을 둔다. 우리당 후보 중에도 이질성이 나타나 잡탕처럼 보일 정도다.
그러나 각 집단은 문화적 코드에서는 조금씩 다르다. 문화적 코드는 대중과 대화하는 방식, 정치 이벤트를 선거에 활용하는 방법 등에서 드러난다. 전통적 관념과는 다른 새로운 것이 태동하고 있다. 정치 집단의 성격을 드러내는 핵심은 문화적 코드의 차이다.
손=각 집단의 정책을 비교하면 뚜렷하게 이념적 차이를 나타낸다. 국가보안법 등 정책 묶음에서 그런 차이가 난다.
■ 승인과 패인
손=이번 총선은 '누가 자살골을 넣지 않느냐'의 경쟁이었다. 우연성의 정치였다. 대통령이 탄핵을 자초, 3점 자살골을 넣었는데 야당이 경기 5분전에 자살골 10골을 넣은 것이 의석 수로 나타났다.
탄핵 없었으면 민주당 분당에 따른 분열로 우리당이 1당이 될 수 없었다. 탄핵이라는 큰 바람이 표의 쏠림 현상을 불러온 것으로 해석된다. 동시에 거야 견제론보다는 거여 견제론이 더 설득력 있었다. 한나라당이 차지한 120여석은 이를 말해준다. 지역주의도 원인이 됐다. 우리당과 지역적 기반이 겹치고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한 민주당, 자민련은 참패할 수밖에 없었다.
민노당의 약진은 냉전주의가 약해졌고 3김 정치 퇴조로 지역주의가 약화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 DJ와 노무현 정부 때문에 승리했다. 두 정권이 보여준 신자유주의 정책이 진보 정당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국민들에게 심어준 것으로 보인다.
김=이번 총선 결과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우리당은 문화 변동의 내용을 알고 선거에 임했다. 이는 97 대선 때 DJ가 처음 시험한 선거 전략의 연장선상에 있다.
첫째는 지역이다. 충청을 공략해 호남과 연계하면 승산이 높아지는데 반해 한나라당은 영남만 붙들어 패배를 자초했다. 우리당에는 서민 계층을 파고 드는 진보적 색깔이 있다. 또 문화적 세대적으로 젊은 층을 파고 들었다. 지역 세대 문화라는 3두 마차를 타고 승리한 것이다.
탄핵이 굉장히 중요했지만 우리당이 얻은 지지율은 탄핵 이전의 수준이다. 요컨데 우리당 승리는 지역 세대 진보 이념을 결합한 전략, 당의 정체성에 따른 필연적 결과다.
민노당의 승리도 필연적이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50여명의 단체장·의원을 배출하는 등 잠재력을 길렀고 1인2표제를 도입한 선거 제도 개혁이 민노당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헌재 탄핵심판에 미칠 영향, 재신임 문제, 노 대통령 국정 구상
손=헌법재판소 법관들도 정치적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보면 (탄핵심판은) 이미 끝난 일이다. 어떻게 매듭짓느냐가 문제다. 정쟁을 해서는 안 된다. 노 대통령이 사과를 하고 여야간 정치적 타협을 해야 한다. 이번 선거는 '양날의 칼' 이다. 이제 노 정권도 핑계가 없어져 무한책임을 지게 됐다. 선거법 위반자가 많은 우리당은 재보선 통해 과반 이하로 떨어질 가능성 크다. 독단적 국정 운영을 하면 이번 결과가 '축복으로 위장된 저주'가 될 수 있다.
김=우리당이 권력으로 무엇을 하려는지 잘 모르겠다. 가장 큰 모순이다. 선거엔 탁월하나 통치에선 한계가 있다. 선거에서 이기려 쟁점 피하고 이미지 정치한 탓에 지지집단이 이질적이고 왜 표를 주는지 모르면서 투표한다. 결국 선거에서 승리해도 집권 세력으로서는 딜레마가 있게 된다.
손=노 대통령은 스타일만 그렇지 내용은 급진적이지 않다. 전투적 리더십은 다수일 때는 안 되며 진정한 개혁을 위한 대치선을 만들어야 한다. 한나라당은 선전했지만 오만해지면 안 된다. 정책 경쟁해야 한다.
김=주목할 두 집단이 있다. 민노당은 민생 현안에 대한 구체적 안을 갖고 있다.정책전문가들이 모인 한나라당 비례대표가 어떤 이니셔티브를 취하느냐에 따라 차별화를 할 수 있다.
손=모든 법안의 처리가 가능한 우리당의 정책 능력도 주목해야 한다. 견제가 없어 위험할 수도 있다.
김='여대야소'에서는 야당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민노당이나 한나라당이 만든 법안에 언론이 관심을 가지면 정책 논쟁 자극제가 될 것이다.
■향후 국회와 정당 운영
손=사회적 갈등, '고용 없는 성장', 지구화라는 변화 속에서 우리 발전 모델이나 사회 통합 모형 등에 대한 정책적 논쟁을 해야 한다. 소모적 당쟁을 막을 자유 투표를 일반화해야 한다.국회 윤리위원회를 강화하고 개헌 문제 등을 다룰 정치개혁범국민협의회 제도도 갖춰야 한다.
김=이번에 신인이 과반이다. 신인들이 의원 역할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에 옮기는 데 최소 6개월 걸린다. 의원들이 국민들 바람에 부응하려면 임무와 책임을 구분해야 하고 의원 역할을 숙지하는 게 가장 시급하다. 가장 큰 변수는 대통령과 여당의 관계다. 여당은 '대통령의 정당' 역할과 행정부를 견제하는 역할 사이에서 고민을 해야 하며 우선은 행정부를 견제하는 국회 구성원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손=한국처럼 '물갈이'가 심한 나라가 없으나 물갈이가 해답은 아니다. 신인들은 타락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깨끗할 뿐이다.
■ 선거 캠페인 평가
손=돈 선거나 동원 선거는 없어졌지만 미디어 선거를 위한 인프라가 전혀 없었다. 돈 선거를 막는데는 성공했으나 입을 여는데는 실패했다. 탄핵바람에 이미지 선거가 됐는데 결국 내용 아닌 포장 대결이었다.
김=감성도 아니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선거 운동이었다. 울고 기고 (머리) 깎고 안 한 게 없다. 이런 식의 선거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 차기 대선과 새로운 리더십
손=차세대 지도자로 거론되는 사람들도 이미지만 있지 내용이 없지 않나. 이런 추세라면 향후 한국이 걱정스럽다.
김=지지 기반이 부실해 언제든 낙마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3김과의 큰 차이다. 그래서 이미지 전략을 쓰는 것 같다. 철학이 빈곤한데 3년 반 공부한다고 메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정치 제대로 하려면 돈 적게 들어야 하지만 정치가 정책을 중심으로 개편되려면 돈이 엄청 든다. 돈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투명성이 중요하다.
김=이제 정치판이 싸움 좀 그만했으면 한다. 대통령도 그렇고 여야도 그렇다.
손=건설적 싸움은 해야 한다. 대통령도 이번에 전화위복 됐지만 '스타일의 급진주의' 때문에 야당이 승리할 수도 있었다. 스타일의 급진주의는 바뀌어야 한다.
/정리=주훈기자 nomade@hk.co.kr
사진=최흥수기자
손호철(孫浩哲·52) 교수
서울대 정치학과 졸
미 텍사스대 정치학박사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공동의장
서강대 정외과 교수
김병국(金炳局·45) 교수
미 하버드대 경제학과 졸·동 대학 정치학 박사
한국정치학회 편집이사
전 한국일보 객원 논설위원
고려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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