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이뤄진 무참한 파괴와 피폐해진 농촌 모습 때문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화해와 상생을 기원하며 3월 1일 탁발순례를 떠났던 전북 남원 실상사 도법, 수경 스님이 14일 남원 만인의총에서 지리산권 순례를 마쳤다. 두 스님은 17일 보고 모임을 갖고 그간의 순례 과정을 설명할 계획이다. 두 스님은 이원규 시인 등과 함께 남원을 출발해 전남 구례와 경남 하동, 산청, 함양을 거쳐 다시 남원까지 1,500여리를 45일간 걸었다. 그 동안 농민 상인 초등학생 시장 군수 경찰서장 이장 목사 신부 등 4,000여 명을 만났으며 그들에게 생명과 평화의 소중함을 말하고 그것을 함께 지키자고 다짐했다.
순례단은 약속대로 음식과 잠자리는 탁발 즉 동냥에 의존했다. 교회와 성당, 마을회관은 물론 좁은 민가에서도 하룻밤 신세를 졌는데 다행히 굶거나 한데서 자는 일은 없었다. 촌로들은 일행이 나타나면 적막한 마을에 활기가 돈다며 반겼고, 교회와 성당에서도 잠자리와 음식을 내주었다. 이들이 탁발을 선택한 것은 베풀고 나눔으로써 같이 행복해지자는 뜻에서였다.
산청군 외공마을과 방곡마을, 함양군 서주마을에서는 한국전쟁 때 학살된 양민의 넋을 달래는 위령제를 올리고 그 같이 억울한 일이 재발하지 않기를 기원했다.
두 스님은 짬을 내 강동석 건설교통부장관을 만나 19번 국도 확장 계획 재검토 약속도 받아냈다. 하동읍에서 화개장터에 이르는 왕복 2차로의 이 길은 섬진강의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아름다운 길이다. 그러나 관광철에 길이 막힌다는 이유로 4차로 확장 계획이 세워지자 두 스님이 섬진강 환경 파괴를 막겠다며 과천으로 올라간 것이다.
지난해 새만금사업에 반대, 전북 부안에서 서울까지 삼보일배를 한 수경 스님은 무릎 통증이 재발하고 독감에 걸려 병원을 두 번이나 찾았지만 무사히 순례를 마쳤다.
순례에는 문화예술인들도 함께 했다. 하동군 악양면에 사는 박남준 시인은 순례구간 대부분을 함께 걸었고 위령제 때는 시를 지어 죽은 양민에게 바쳤다. 구례에 내려와 있는 소설가 김남일씨도 순례에 잠시 동행했고 시인 김용택, 가수 김원중씨 등은 하동에서 열린 '지리산 생명평화의 밤' 행사에 참가해 시를 낭송하고 노래를 불렀다.
순례단은 생명 파괴의 실상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것을 목격했다고 전했다. 농촌은 젊은이들이 모두 떠나 이미 붕괴 상태에 이르렀고, 민족의 영산 지리산은 호텔 콘도 등 숙박시설과 도로 건설 등으로 쑥대밭이 됐으며 맑디 맑은 강물은 오염이 심각했다.
도법 스님은 "절망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스님은 "자연과 농촌은 우리의 뿌리이기 때문에 그것들이 사라지면 우리가 존재할 수도 없고 우리의 심성도 황폐해져 미움과 갈등이 커질 것"이라며 "그런데도 개발과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파괴를 자행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원규 시인은 "길에서 만난 사람들 대부분이 생명과 평화를 지키자는 순례단의 취지에 공감했다"며 "이들의 뜻이 모이면 전쟁을 막고 증오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22일 4·3사건의 아픔이 남아있는 제주도로 건너가 한 달 가량 순례하고 다시 내륙으로 돌아와 본격적인 전국 순례를 시작한다. 순례가 언제 끝날지는 이들도 모른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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