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철마다 후원회 우편물이 홍수를 이뤘는데, 이번에는 조용히 지나갔습니다."선거일인 15일에도 출근한 A그룹 회장실의 한 임원은 선거 풍속도가 확실히 달라졌다고 말했다. 후원회가 대폭 줄기도 했지만 정치권이 노골적으로 기업에 손 내미는 일이 거의 사라졌다는 것이다. 재계는 선거문화의 변화를 크게 환영하고 있다. 4년마다 돌아오던 기업의 '준조세 부담'이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권이 완전히 환골탈태했다고 믿는 재계 인사들은 아직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선거철 재계 총수들의 해외출장 붐은 이러한 재계의 속내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B그룹의 회장은 1월 출국한 이후 3개월이 다 되도록 해외에 체류하고 있다. 홀수 달은 국내, 짝수 달은 일본에 머물며 그룹을 챙기던 또 다른 그룹의 회장도 지난해 10월 이후 일본에서 귀국하지 않고 있다. 국내 굴지의 그룹 총수들 역시 최근 해외 에서 귀국했다. 조금 다른 경우지만 검찰의 비자금 수사를 피해 도피성 출국을 한 그룹의 회장도 몇 개월째 미국에 가 있다.
재계 총수들의 선거철 해외 체류는 정치권과의 만남을 원천봉쇄하기 위해서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기업인에게는 선거철 정치인의 안부 전화 한 통화도 부담스럽다는 것. 아예 자리를 비우는 게 최상책이라는 게 경험에서 터득한 처방이다. '돈 주고 뺨 맞는' 일을 당한 적이 어디 한두 번의 일이었던가.
재벌 총수들이 선거철에도 자리를 비우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 정치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총선에서는 투표장에서 당당히 한 표를 행사하는 재벌 총수들의 모습을 보고 싶다.
/박일근 산업부 기자 ik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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