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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공동善 지킴이 서영훈<19> 북한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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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공동善 지킴이 서영훈<19> 북한을 다녀와서

입력
2004.04.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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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을 왕복하면서 직접 보고 듣고 자료를 통해 알게 된 것이 당시 북한이 남한보다 경제면에서 좀더 발전됐다는 점이었다. 그때 우리는 새마을운동을 막 시작하던 때였다. 1인당 국민소득(GNP)은 남북한이 370∼380달러로 거의 같았다. 그러나 남한은 도농(都農), 계층간에 부의 편중이 심했다. 또 향락·사치산업도 GNP에 들어가니 사실은 북쪽이 앞서가는 것이었다. 북한은 자동차공업이 발달해 트랙터를 생산하고 있었다.남북은 이념·사상은 물론 문화, 의식, 생활과 행동양식 등 모든 것이 상반되고 이질화 돼 있었다. 한번은 어느 호텔 식당에서 아침을 먹는데 한복을 입은 접대원에게 남측 자문위원 한 사람이 "옷이 참 매력 있고 아름답다"면서 호감을 표시했다. 그러자 북한적십자사 대표단의 한 사람이 정색을 하고 "여기가 남조선처럼 부패한 줄 아시오. 그 분이 우리보다 높으신 분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음식점 접대원을 지휘하는 그 여성은 최고인민훈장을 받아 북적 대표들보다 당 성분이나 지위가 더 높았던 모양이다.

서울에서 2차 회담이 열린 1972년 9월이었다. 북적 대표단이 평양으로 떠나기 전날 명동 미도파 옆 한진빌딩 3층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였다. 식후 휴식 시간에 북측 자문위원 윤기복(尹基復)씨가 나한테 다가오더니 거리를 내려다 보며 "서 선생, 이 남한도, 서울도 걱정입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내가 "무슨 소리요"라고 반문하자 그는 "우리가 잘 아는데 백화점이나 호텔, 자동차가 여기 이렇게 많은 걸 보니 대한민국 경제가 여기에만 몰려 있고 다른 데는 비어있는 것이 아니오"라고 했다.

나는 평양에서 두 번, 서울에서 두 번 등 4차 회담 때까지 대표로 참가했다. 어느 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명령인데, 대표들이 북한에서 보고 온 것을 전국을 다니면서 강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둘씩 나눠 전국을 순회했다. 나는 조덕송(趙德松) 조선일보 주필과 함께 호남과 제주지방을 맡았다. 나는 괜히 걱정이 돼 정홍진(鄭洪鎭) 남북회담사무국장에게 "강연에 참고할 무슨 지침이라도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보고 느낀 대로 말하면 된다. 완전히 자유다"라고 했다.

조 주필은 언변이 좋아 사람들을 웃겨가며 북한과 남한의 차이점을 얘기하고 북쪽 흉을 많이 봤다. 나는 "그들의 흉만 볼 것 아니다. 가보니 건설이 잘 됐다. 그러나 자유는 없고 철저한 계획과 통제로 움직이는데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당과 국가의 목적에 맞춰 동원하는 체제다, 우리는 자유를 많이 누리고 있고 세계 사정을 잘 아는 것이 장점이나 낭비가 너무 많고 혼란스럽다. 냉정하게 남북을 비교하고 우리가 정신차려야 한다"고 했다. 그 때는 이런 얘기를 잘 못하면 사상을 의심 받는 때였다. 나로서는 상당한 용기를 갖고 한 것이었다. 조금은 불안을 느끼면서 제주에 갔는데 수행한 중앙정보부 과장이 지금까지 여러 사람이 강연한 내용 중에 서 선생이 제일 잘한다고 위에서 평가했다는 이야기를 해주어 나를 의아하게 했다.

그 후 한달 반쯤 지나 10월 유신이 발표됐다. '국력의 조직화' '능률의 극대화'가 그 구호였다. 10월 유신은 박 대통령이 적십자 회담을 전후해 북한의 실정을 알고, 조직적으로 우리의 국력을 키워나가기 위해 취한 특단의 조치였던 것 같다. 그 후 8년간 강권통치로 국민의 자유를 통제하고 민주주의를 억압하며 '국력신장강화'를 추진하다 10·26사태를 맞게 된다.

남북적십자회담은 1, 2차 회담에서 남북이산가족의 생사확인, 자유로운 방문과 상봉, 자유로운 서신 왕래, 자유의사에 의한 재결합, 기타 인도적 문제 등 5개항의 의제에 합의를 보았으나 3차 회담부터 북측이 선결조건으로 내세운 '남한의 반공법폐지와 반공기관 및 단체들의 해체'요구로 교착상태에 빠져 7차 회담을 끝으로 중단됐다. 85년 재개돼 3차례 회담이 열린 뒤 한 차례의 이산가족 고향방문이 있었고 다시 2000년 남북 정상회담 후 이산가족 상봉이 이어져 9차 상봉까지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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