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간의 17대 총선전은 각종 바람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역전과 재역전의 혼전으로 점철된 대혈전이었다.선거전은 탄핵 역풍이 최고조에 달한 2일 열린우리당의 압도적 우세 속에 공식 개막됐다. 그러나 17대 총선전 드라마는 앞서 3월12일 국회에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면서 사실상 시작됐다고 봐야 한다. 민심은 급속히 야당을 등졌다. 여론조사에서 한나라당은 10%대, 민주당은 5%도 되지 않는 지지도로 곤두박질 쳤다. 반면 열린우리당의 지지도는 50%를 훌쩍 넘었다.
야당에겐 총체적 위기 상황이었다. 우리당이 250석을 가져가리라는 예상도 나오는 가운데 야당 후보들은 길거리에서 명함이 찢기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승부는 이미 결정된 것처럼 보였다.
3월23일 난파 직전의 한나라당은 임시전당대회를 열어 박근혜 대표에게 키를 맡겼다. 박 대표가 맨 처음 한 일은 콘크리트 당사를 버리고 천막을 치는 것이었다. 26일 선대위를 구성, '거여(巨與)견제론'을 들고 나왔다. 사죄의 108배도 했다. TK에서는 박풍(朴風)이 미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좀체 집안싸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탄핵 역풍의 책임을 두고 3월말 시작된 내분은 추미애 단독 선대위원장 체제가 출범하면서 일단락되는 듯했다. 하지만 3월30일 추위원장이 호남 중진들의 공천을 전격 취소하면서 다시 불이 붙었다.
이러던 차에 공식선거운동 개시를 전후, 우리당 정동영 의장의 노인 폄하 발언이 돌출했다. "60,70대는 투표 안 해도 괜찮다"는 그의 발언은 판세 전체를 다시 흔들어놓기 시작했다. TK에서부터 불기 시작한 박풍은 노풍(老風)을 타고 거세지기 시작했다. 민주당 추 위원장은 3일 광주에서 사죄의 3보1배 행보를 시작했다.
풍향계는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나라당의 상승, 우리당의 하강 사인을 일제히 알리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우리당은 탄핵역풍에 다시 불을 지피기 위해 5일 야당들에게 탄핵철회 회담을 제의했다.
6일과 7일에는 이라크 무력충돌 사태가 확산하면서 추가 파병문제가 종반 쟁점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민주당은 파병철회를 들고나오는 등 막판 반전을 시도했다.
그 즈음 한나라당 상승세가 TK, PK를 돌아 수도권으로 북상하기 시작했다. 우리당은 '거야 부활론'으로 맞불을 놓기 시작한다. 급기야 정동영 의장이 선대위원장과 비례대표 후보를 내놓고 당사에서 단식농성을 시작, 배수진을 쳤다. 총선을 사흘 앞둔 12일 저녁이었다.
/이동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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