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우리 사회를 살아가면서 느끼는 당혹감은 '진실과 허위'라는 양자택일보다는 '진보와 보수'의 양분법이 팽배해 있다는 점이다. 선거가 코앞에 다가온 지금 각종 이미지 정치가 등장하면서 어떤 사안의 진위 여부를 밝히는 것보다는 모든 것을 진보와 보수, 혹은 구세대와 신세대의 갈등구조로 몰아가는 듯이 보인다. 지역주의가 되살아나는 것도, 박정희 향수가 부활하는 현상도 모두 역사적 진실과 왜곡 사이의 분명한 평가보다는 선거를 앞둔 두 정당 간의 대결구도로 환원되고 있다.며칠 전에 만나 뵌 한 원로는 '이 땅의 사람 중 과연 얼마가 스스로를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가'를 반문하셨다. 독립운동을 한 후손들은 경제성장을 찬미하는 이 땅에서 달동네를 떠돌고 있고, 독재자의 아들은 수십 억원의 재산을 주무르며 이 땅에서 무위도식하고 있다. 제주 4·3 사건에서부터 보도연맹사건, 한국전쟁 중 도처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을 통해 희생된 수십만 희생자 가족들의 원망과 분노는 아직도 풀리지 않았고, 진실에 대한 규명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민주화운동 중에 희생당한 피해자에 대한 진상조사와 명예회복도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일제 강점 하 친일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에 관한 특별법'은 16대 국회 마지막에 친일파 후손이나 과거 규명을 원치 않는 세력에 의해 왜곡·수정되어 통과되었다. 과거의 진실을 밝히는 것을 통해서 '역사를 가진 민족'으로 살아가려는 노력들은 '보복과 분열을 조장하는 행위'로 수구세력에 의해 매도되었다. 누가 이런 조국에 애정을 가지고 헌신하겠는가? 어떤 국민이 이 땅의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살아오는 과정에서 특별히 피해로 원한이 맺힐 분은 아니었지만 이 분에게도 살아온 80여 년의 삶 속에서 경험한 우리 역사는 여전히 과거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블랙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근대 국민국가는 그 형성이 완료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다. 우리 모두는 지금도 대한민국의 재형성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선거는 새로운 국민국가 구성의 또 다른 출발이다. 이제 한국의 시민사회는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월드컵에서부터 최근의 탄핵 무효 촛불행사에 이르기까지 평화적인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실천하려는 우리 국민의 모습은 국제사회에서 많은 칭송을 받았다. 대의제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국회의원에 의해 자행된 무책임한 탄핵 가결을 국민은 참여민주주의를 통해 제어하려 하였다. 특히 국민적인 열기를 필요한 시점에서 절제할 줄 아는 촛불행사에 대해 인근 일본이나 미국 지식인들은 경탄의 인사를 전해왔다. 이렇게 성숙된 시민의식을 토대로 우리는 국민국가의 재형성에 적극 참여해야 하고, 그래서 이번 선거는 한 단계 승화된 새로운 민주주의로의 도약대이어야 한다.
그러나 최근에 들리는 소식에 나는 우울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리라 생각했던 지역주의가 슬며시 고개를 쳐들고 있다. 선거 막판의 유권자 표심은 각 당이 연출하는 이미지 정치를 따라 동요하고 있다. 내일로 다가온 총선에 유권자는 적극 참여해야 하고, 새로운 국민국가 형성을 향한 자신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표출해야 한다.
우리가 바라는 새로운 국가공동체는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작업을 통해 과거를 청산하고 부패세력을 해소하고 소수자를 포함한 보통 사람의 인권과 삶이 보장되는 그런 사회이어야 한다. 지금은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 공동체를 세우려는 유권자 개개인의 냉철한 판단과 역할이 참으로 요긴한 시점이다.
/정현백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