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한적십자사 청소년적십자 부장으로 10여년을 지내는 동안 참으로 많은 젊은이들을 알게 됐다. 그 때 국제청소년대회 등에 뽑혀서 갔던 사람들이 지금도 우리 사회 각계 각층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1956, 57년에 미국적십자사 주최로 일본 기후(岐阜)의 미군 공군기지에서 한·미·일·필리핀 4개국 청소년 적십자 대표 100명을 모아 지도자 훈련을 한 적이 있다. 박한식(朴漢植) 미 조지아주립대 교수, 오택섭(吳澤燮) 고려대 교수, 성숙자(成淑子) 성신여대 교수, 신미자(辛美子) 소아과병원장 등이 갔다. 우리 학생들이 영어를 잘하고 적십자 활동도 제일 잘 알아 매일 '그날의 의장'(chairman of the day)을 도맡아 했다. 박한식군에 대해 좀 더 말하고 싶다. 경북고 청소년적십자 단장을 했던 그는 4·19 무렵 세계평화정부에 대한 논문을 써서 함석헌(咸錫憲) 선생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얻은 평화주의자이다. 조지아주립대에 동북아문제연구소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는데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과 절친한 사이다. 카터의 메신저로 북한을 빈번히 출입하면서 나에게 자주 들르곤 했다. 해외의 손꼽히는 북한연구 권위자로 많은 성과가 기대된다.
59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적십자대회에는 신웅식(申雄湜) 국제변호사, 문학숙(文鶴淑) 경북대 교수, 김용기(金龍起·작고)군 등을 인솔해 참가했다. 그 중 김용기는 경복고 1년생으로 참가자 400명중 제일 어린 나이인데도 재능이 뛰어나고 토론토로터리클럽이 주최한 환영회에서 영어로 답사를 매우 잘하여 많은 칭찬을 받았다. 그 뒤 미국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날 교통사고로 불행하게 요절했다. 지금 외교통상부 장관을 하는 반기문(潘基文), 곽영훈(郭英薰) 환경그룹회장 등은 62년 미국적십자사 주최 대회에 참가하여 역시 많은 인기를 끌었고 존 F 케네디 대통령도 만나 격려를 받았다. 충주고에 다니던 반기문은 농부의 아들이고 가난했는데 영어를 기가 막히게 잘했다. 충주비료에 근무하던 미국인 기술자를 알게 돼 그로부터 영어를 배웠던 것이다.
청소년적십자 출신으로 크게 된 사람들은 셀 수 없이 많다. 국회의원을 한 봉두완(奉斗玩) 박석무(朴錫武) 현경대(玄敬大) 강창희(姜昌熙), 이인호(李仁浩) 전 러시아 대사, 정근모(鄭根謨) 전 과기처 장관, 현소환(玄昭煥) 전 연합통신 사장, 홍석현(洪錫炫) 중앙일보 회장, 윤식(尹埴) 4·19회장, 홍소자(洪昭子)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장석준(張錫俊) 전 보건복지부 차관 등이 생각난다.
공부 잘하고 사회에서 잘 나간 이들 말고도 각계각층의 많은 젊은이들을 만났다. 50년대 말부터 한적에서 구두닦이를 하던 소년이 있었다. 무척 가난했지만 참 영리했다. 60년대 초 그에게 취직 보증을 서주었다. 1년쯤 뒤 신문을 보니'○○야. 다 용서해줄 테니 돌아와달라'는 광고가 났다. 알아보니 회사 돈 100여만원을 빼내 행방을 감추었다. 한 달쯤 후에 나타난 그는 일본에 가서 공부해 성공한 후 신세도 갚을 결심으로 밀항선을 타려 했지만 배를 구할 수 없어 돌아왔다고 털어놓았다. 다시 다른 회사에 취직 보증을 서주었다. 71년 대선 때 공화당의 박정희(朴正熙) 후보가 장충단 공원에서 유세하는 날이었다. 조간신문 사회면에 나를 놀라게 한 기사가 났다. 공화당 사무처를 사칭해 유세장에 빵을 두 트럭이나 주문해 놓고 가짜 수표를 준 뒤 거액의 거스름돈을 챙겨 달아난 사건이었다. 그 친구였다. 얼마 후 체포되어 2년쯤 형을 산 그는 출감 후 나를 찾아와 "성공하기 전에는 나타나지 않겠다"고 했다. 몇 년 후 한적 사무총장 시절 제주에 가서 TV방송과 회견을 한 뒤 지사장실에 앉아 있는데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제는 성공했다고 했다. 인테리어 회사를 크게 해 직원도 30명쯤 되고 결혼도 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 친구는 착실히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이렇게 여러 사람들을 알고 사귀면서 세상의 명암과 고락, 인간관계의 진실을 보다 깊이 깨닫게 된 것이 내 삶의 한 보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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