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들이 총선을 앞두고 진보 정당을 지지한 것은 놀랍다. 영화의 화려한 이미지에 익숙해 있기 때문인지, 이변처럼 보이기도 한다. 봉준호 박찬욱 문소리 등 영화인 226명의 민주노동당 지지선언문은 명료하다. '…이제는 노동자 농민 서민의 이해를 대변할 정당이 필요하다.'지지선언 참여자를 50명 정도로 예상했는데 네 배가 넘어 자신들도 놀랐다고 한다. 영화가 첨단 예술이어서 의식도 어느덧 진보적이 된 것인가. 영화사에 획을 긋는 변화다. 이들의 정치적 입장은 열린우리당에서 핵심역할을 했던 명계남 문성근과는 차이가 있다. 두 배우보다 더욱 진보적 입장을 드러낸 반면, 능동적 역할에서는 한 발 물러서 있는 듯하다.
새삼 이들의 영화를 돌이켜 보면, 대부분 강한 사회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들은 영화를 통해 비인간적 냉전상황과 사회구조적 폭력을 날카롭게 고발하고, 소외계층의 인권문제를 새롭고 용기 있게 조명했다. 대중은 참신한 목소리에 박수를 보냈고, 그 영화들은 계속 '대박'을 터뜨렸다. 이번 선언은 영화인의 작업적 신념과 정치적 입장을 일치시키고 있다. 언행일치인 셈이다.
그것은 또한 자신의 위상을 성찰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박이 터져도 모두 단 열매를 맛보는 것은 아니다. 영화계 안에서도 풍요와 비(非)풍요가 크게 나뉘고 있다. 풍요층과 비풍요층 간 갈등의 단면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영화계 뿐 아니라, 많은 예술인의 삶은 여전히 험하고 남루하다. 빈곤으로 인한 고통이 기초예술 장르에서 특히 심각하다.
정부조사에 따르면, 문학 미술 음악 연극 등의 문화예술인 중 31%가 창작 관련 월수입이 전혀 없다. 14%는 10만원 이하다. 가슴 아프게도 이들은 예술활동을 하면서 다른 일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62%가 가난 속에서 예술활동에 만족하고 있으니, 예술인이란 어쩔 수 없이 타고난 존재들이다. 예술인 중 빈곤층이 증가한 반면, 200만원 이상의 고소득자도 함께 늘고 있다. 소득 격차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예술계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사회가 대중문화에 깊이 침윤되기 때문이다. 그 책임은 정부의 무신경과 문화정책 부재에 돌아간다. 선진국이 되려면 대중사회화에 맞춰 기초예술을 자상하게 보호해야 한다. 미국은 1960년대부터 '학교 안 시인 프로젝트' '예술인과의 만남' 등을 도입했다. 예술인을 각급 학교에 고용하여 예술을 영어 수학 과학처럼 핵심교과로 대우했다. 교육과 예술인이 함께 보호를 받아온 것이다.
프랑스는 1960년대 '데뷔 전시회를 돕자'라는 캠페인을 추진했다. 데뷔 전을 여는 화랑에 50%의 비용을 지원하고, 화랑은 수익금의 절반을 화가에게 제공한다. 협회가 연극 무용 음악 등의 작가나 단체를 추천하면 문화부가 25%의 제작비를 지원한다. 한국인을 포함하여 파리 시에서 주택과 작업실을 제공 받는 화가도 여럿 있다.
예술인들은 기초예술 보호를 위해 문예진흥법 개정을 추진해 왔다. 관 주도의 문예진흥원을 폐지하는 대신 민간 문화예술위원회를 설치하고, 복권 수익금 일부를 예술인을 위해 사용하자는 등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16대 국회에서 정치적 이유로 좌절되었다. 17대 국회를 앞두고 최근 60여 문화예술단체가 '기초예술 살리기 범문화예술인연대'를 출범시켰다.
문화예술은 시민의 긍지를 높이는 귀중한 유산이다. 예술만큼 넉넉한 인간성과 윤택한 사회를 가꿔주는 것도 없다. 황석영 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장은 기초예술 분야가 겪는 고통을 이렇게 전한다. "화가는 전시공간을 찾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연극인은 소중한 무대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시와 음악과 아름다운 색채가 없는 회색도시가 우리가 꿈꾸는 미래의 모습일 수는 없다." 예술을 배고픈 직업으로 낙오 시키는 것은 모두의 수치다.
/박래부 논설위원 parkrb@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