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4월13일 당시 대통령 전두환이 대통령 간선제를 규정한 제5공화국 헌법으로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치르겠다고 선언했다. 그것은 대통령 직선제를 민주주의 회복의 핵심으로 여겼던 시민들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였다. 대통령 7년 단임을 규정한 당시 헌법에 따라 재출마를 할 수 없었던 전두환은 당초 내각제 개헌을 통해 국회 다수파를 움켜쥠으로써 집권을 연장할 뜻을 지닌 것으로 관측되었다. 제1야당 신한민주당 총재 이민우는 일정한 민주화 조처가 병행된다면 내각제 개헌을 받을 수도 있다는 이른바 '이민우 구상'으로 당시 여권의 의중에 맞장구 친 바 있다.민주화 전망의 불투명과 이민우 자신의 정치적 야심이 결합해 나온 '이민우 구상'은 그러나 신한민주당의 실질적 '오너'였던 김영삼·김대중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었다. 두 김씨는 그 해 4월8일 자신들을 따르는 의원 74명을 탈당시켜 신한민주당을 껍데기로 만들었다. 전두환의 닷새 뒤 호헌 선언은 신한민주당의 실질적 붕괴로 국회에서의 내각제 개헌 합의가 물 건너갔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 호헌 조치는 엄청난 역풍을 불러일으켰다. 폭력배들을 동원한 정권의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두 김씨는 5월1일 김영삼을 총재로 해 통일민주당을 출범시켰고, 통일민주당과 재야 민주화운동 단체들이 연대해 발족시킨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는 집권 민정당 대표 노태우가 여권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6월10일부터 전국적 반정부 시위를 조직했다. 6월항쟁이라고 불리게 될 시민 혁명의 시작이었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라는 슬로건 아래 이뤄진 이 시위들에 다수의 일반인들이 참가하면서 전국의 아스팔트는 시민과 정권의 싸움터가 되었다. 5공화국 정권은 결국 그 해 6월29일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였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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