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영화 여성 캐릭터를 자세히 살펴보면 작은 트렌드 하나가 발견된다. 바로 팜므 파탈(Femme Fatale), 말 그대로 풀자면 '치명적인 여인'. 흔히 '요부'라는 일반용어로 바꿔 사용하기도 하지만, 팜므 파탈이라는 말은 할리우드의 누아르 장르에서 유래된 특수용어다. 남성을 주로 성적으로 유혹해 파멸시키는 여성들은 유난히 누아르 장르에서 두드러졌고, 그녀들이 쳐놓은 운명의 거미줄에 걸려 숱한 남자들은 버둥거리기 마련이었다.먼저 '바람의 전설'. 이 영화에서 주인공 외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캐릭터를 꼽으라면 아마도 꽃뱀(문정희)일 것이다. 순진한 표정으로 카바레 구석에 박혀 있다가, 남자의 손길이 닿자마자 동공이 풀리고 눈의 흰자위와 검은자위 비율이 바뀌면서 춤에 빠져드는 여인. 하지만 남자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은 후엔 다시 새로운 먹이를 찾아 날아가는, 화려한 불나방 같은 여자다.
15일 개봉하는 '범죄의 재구성' 또한 팜므 파탈 한 명을 거느리고 있다. 서인경 역을 맡은 염정아는, 팜므 파탈이긴 하지만 귀엽고 맹한 기질이 있는 여자. 돈을 노리고 앙큼한 짓을 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만 아는 여자는 아니다. 여기서 팜므 파탈의 오지랖을 조금 넓혀 본다면 '어린 신부'의 문근영이나 '아홉살 인생'에서 금복이 역을 맡았던 나아현까지도 포함될 수 있을까? 남편이 있음에도 은근히 한눈 팔거나, 자기 남자 안 빼앗기려고 악바리처럼 구는 모습은 차세대 팜므 파탈로 주목할만한 모습들이다.
한국영화에서 팜므 파탈의 연대기는 육체파 여배우의 역사와 묘한 공집합을 이룬다. 이름조차 강렬한 도금봉 여사나 커다란 눈망울이 인상적이었던 노경희 선생은 1950∼60년대 한국영화의 섹슈얼 카리스마. 이후 수많은 글래머 스타들이 등장했고, 각자의 개성을 바탕으로 치명적인 매력을 보여주었지만 '팜므 파탈'이라는 강한 어감에 들어맞는 배우는 없었다. 어쩌면 이건 그녀들의 한계라기보다는 한국영화의 한계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여성이 남성을 파멸시키는 걸 용납하지 않았던 한국영화는 불륜과 위반의 여성에겐 어김없이 징벌의 칼날을 날리기 마련이었으니까.
여기서 한국영화사에 팜므 파탈이라 부를만한 여인이 있었다면 오수미다. 기억들 하실라나? 1992년 42세의 나이에 하와이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그녀는, 스무 살에 데뷔해 온갖 기구한 삶의 역정을 겪었다. 그러기에 80년대 30줄에 접어든 그녀에겐 치명적인 향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녀는 오히려 '안티 글래머'에 가까웠지만, 한 번 찍은 남자는 반드시 파멸시키고야 말았다.
당대 최고의 남자배우 임성민과 공연했던 '색깔 있는 남자'(85년). 축축하고 음탕한 눈빛의 그녀는 속삭인다. "색깔 있는 남자, 당신 날 흥분시켰어." 이후 그 누가 그녀의 악녀성과 도발적인 느낌에 대적할 수 있었을까. '블랙잭'의 강수연? '아주 특별한 변신'의 이혜영? '텔 미 썸딩'의 심은하? 아마도 우린 오수미 같은 배우를 다신 못 만날 것 같다.
/김형석·월간스크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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