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時調)를 짓기가 시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시야 형식에 크게 구애됨이 없이 자유롭게 시상(詩想)을 표현하면 되지요. 하지만 시조는 그것들을 엄격한 율격(律格) 안에 잡아넣어야 합니다. 압축과 상징이 그만큼 더 요구되지요."경남 거제의 혜양사(慧洋寺) 요사채 작은 방에서 향내 그윽한 찻잔을 앞에 놓고 듣는 노승의 시조 얘기는 각별한 맛이 있었다. 방금 떠나온 세속의 삶은 어느새 아득하게 저편으로 멀리 물러섰다. 주지 최도열(崔道烈·63) 스님은 8년 전 정식으로 등단한 시조작가다. 대개의 절은 풍광 뛰어난 산 속에 터를 잡고있으니 주변의 무상한 계절의 변화를 좇는 것만으로도 시심(詩心)이 흠뻑 동할 터. 예부터 글 잘 쓰고 시 잘 짓는 승려들이 유독 많았던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렇더라도 도열 스님은 특별하다. 그는 이미 한국의 최다작(最多作) 시인이다. 그가 지금껏 써낸 시조가 2만 수(首)를 넘겼고, 묶어 펴낸 시조집이 벌써 60권에 달하니 이 정도면 세계적으로도 가히 유례없는 기록일 것이다. 그 경이로운 시작(詩作) 수행의 삶을 들여다 보았다.
과연 남도의 봄 풍경이었다. 진주에서 통영을 거쳐 거제로 들어가는 국도변마다 개나리, 진달래, 산수유, 벚꽃, 목련 따위가 흐드러졌다. 차례를 지키지 못하고 한꺼번에 뒤엉켜 피는 게 정상은 아니련만 어쩌랴, 자연도 어지러운 인간사에 마냥 초연할 수는 없을 터이니. 남도 제일경(第一景)이라고 할만한 거제의 춘경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구름이 드리워져 어둑한 하늘빛에 꽃의 때깔이 더 선연하게 도드라졌다.
최도열 스님의 혜양사는 거제의 제일봉 노자산(老子山) 깊숙한 기슭에 앉았다. 단아한 체구의 노스님은 오전에도 시조 두어 수를 짓고 손수 승복에 다림질을 하던 참이었다.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자마자 선뜻 시조 한 수부터 읊었다. 96년 1월 계간 '현대시조'의 신인공모전 당선 작품인 '명상(冥想)'이다.
명상(冥想)
겹겹이 선 푸른 산 꿈나라가 멀잖다
아득한 해와 달은 접시물에 걸려들어
연노을 한 이파리에 쌈을 싸는 밤이어라
꽃피고 나비 날면 봄이라 이름하고
붉은 단풍 물들면 가을이라 불러도
명상의 하늘 자락에는 봄도 가을도 없어라
문학적 소양이 두텁지 못한 탓에 감히 작품의 수준을 논할 수는 없는 일이나 사념(思念)의 폭과 깊이는 가늠할 듯 싶었다.
하늘을 한 뼘 접시의 얕은 물에 가두고, 한낱 작은 잎새로도 품을 수 있다는. 거침없는 무애(無碍)이자, 가없는 원융(圓融)의 세계다. 이런 마음으로 삶을 볼 수 있다면 세상의 사소한 구분이나 그로 인한 갈등 따위는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랴.
그러고 보니 그의 작품 중에는 비슷한 은유가 적잖다. '광대한 태양 빛이 바늘귀에 들어가고… 거울은 작아도 천지를 뒤집고, 하늘은 비었어도 지구는 매달리고, 노을로 불을 지펴 하늘을 살으리까, … ….' 그는 "50년 수행에서 얻은 깨달음을 시상으로 풀어내는 것"이라고 했다.
경북 안동이 고향인 도열 스님은 겨우 열한 살에 출가를 했다. 서너살 때 아버지를 잃고 아홉살에는 어머니마저 잃었다.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섣달 초엿새 추운 날 빨래를 해 너시고는… 같이 마주앉아 점심을 들다 그냥 스르르 눕듯이 옆으로 쓰러지셨어요."
터울이 많이 나는 형과 누나는 일찌감치 대처로 나가고 어머니와 단둘이서만 살던 어린 소년에게 그 충격이 어떠했으랴. "같은 또래들이 엄마 치마자락에 매달리는 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지요. 학교엘 가도 늘 서리 맞은 풀잎처럼 기가 죽어 지냈어요. 어린 마음에도 삶이 다 뜬구름 같습디다."
그러다 마을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얘기에 귀가 번쩍 뜨였다. "열심히 수행해서 도(道)를 통하면 부모님도 만날 수 있단다." 마을 어른과 인연이 있는 스님을 졸라 따라 나섰다.
그렇게 양산 통도사에서 동승(童僧) 생활을 시작했다. 막상 설법을 들어보니 어머니를 만난다는 건 꿈이었지만, 대신 부처님의 진리를 들으면서 세상의 등불이 되어보겠다는 결심이 섰다.
이태 뒤에 정식으로 수계(受戒) 절차를 밟았다. 합천 해인사, 해남 대흥사, 부산 범어사 등 여러 절에 두루 몸 담는 와중에 태백산 등지에서 수행을 위해 토굴생활도 여러 차례 했다. 그의 법명 도열(道烈)은 "도 닦는데 너무 열렬하다"고 해 얻은 것이다. "낙락장송에 밧줄 하나 잡고 매달리듯, 아기가 어머니 탯줄에 매달리듯 그렇게 몰두했지요." 오죽했으면 스승이 "공부 그만 하라"고 만류하기까지 했을까.
목숨을 걸다시피 한 용맹정진(勇猛精進)으로 건강을 잃은 그는 더 이상 혹독한 수행을 계속할 수 없었다.
거제도는 그때 찾아낸 '따뜻한 남쪽나라'였다. "꿈에 관세음보살의 인도를 받아 절터를 찾아냈지요. 좌청룡 우백호에 뒷산이 여의주를 품은 듯한 명당입디다." 법당을 앉히고 '지혜의 바다(慧洋)'라는 이름을 지었다. 서른 하나 때인 72년이었다.
점차 심신의 안정을 찾게 되면서 문득문득 시상이 떠올랐다. 문학수업을 받은 적은 없지만 어릴 때부터 편지라도 쓰면 주위에서 "시 같기도 하고 소설 같기도 하다"고 감탄했다니 문재(文才)는 타고난 것이었다. "미풍에도 온 몸과 마음이 간지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고 할만큼 감수성도 남달랐다.
한편 두편 쓴 시가 알려져 등단까지 하게 되면서 시작(詩作)이 본격화했다. "시를 쓰는 것은 스스로 마음을 닦고 깨달음을 추구하는 과정입니다. 시조를 짓는 자체가 참선이자 수행이지요." 그래,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 엄청난 양의 시조를 지어냈으랴.
지난달 말에 세어본 게 2만600여 수니 대강만 따져도 매일 일곱편 이상씩을 써낸 셈이다. "하루에 81수를 지은 적도 있습니다. 솟구치는 시상을 감당할 수가 없어 눈물을 줄줄 흘려가면서, 잠 한숨 안 자면서 계속 썼지요." 도무지 믿기지 않았지만 100여 수부터 200여 수까지 담긴 시집들이 서가에 줄 지어 꽂혀있고 미처 정리 못한 원고들이 어지러이 쌓여있으니 기 막힐 따름이다.
모두가 삶과 자연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다룬 작품들의 시제(詩題)나 표현이 중복되지 않는다는 건 더 경이롭다. 그토록 많은 시조를 쉼 없이 써내다 보면 간혹 전에 썼던 것들은 까맣게 잊어버릴 법 한데도. "밝은 마음으로 사물에 눈을 뜨면 주위에 보이는 모든 게 세상의 이치가 되고 시제가 되지요. 그러니 앞으로도 시제가 마르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의 시조는 하늘, 바람, 새, 구름, 해와 달, 별 등 자연을 다룬 것이 대부분이지만 애틋한 연가(戀歌)풍도 많다. 심지어 커피숍과 나이트클럽을 소재로 한 작품도, 아프리카나 남미의 자연공원을 노래한 것들도 있다. "커피집은 누가 약속장소로 정해 가봤고, 나이트클럽이나 외국의 풍광은 TV 뉴스나 '동물의 왕국' 프로그램 등을 보며 얻은 시상이지요."
물론 독서량도 엄청나다. 하나의 시상을 볼펜으로 꾹꾹 눌러 옮기는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3, 4분이란다. 풍부한 표현을 위해 국어사전을 읽고 또 읽어 몽땅 암기할 정도가 됐다. '자부룩한' '가붓가붓' '도리방실' '물마리' 등 맛깔나는 시어들은 그렇게 몸에 배고 입에 배인 것들이다.
요즘 도열 스님의 지인들은 세계최다 시작(詩作) 기록을 기네스 북에 올리기 위해 작품정리와 자료수집, 절차 수소문 등으로 부산하다. "기록 도전이란 어찌 보면 불자(佛子)답지 않은 집착 아니냐"고 물었더니 빙긋 웃었다. "물 흐르듯 마음 가는대로 쓰다 보니 어느덧 이렇게 쌓인 겁니다. 기록을 의식했던 게 아니지요. 또 대개의 기네스 기록이란 게 흥미 위주의 기이한 것들이지만, 시는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정신적, 문학적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게 다르지요. 제 시조들은 중생들에게 간곡히 들려주고 싶은 설법이기도 합니다." 이준희/편집위원 junlee@hk.co.kr
■스님도 그렇지만 그가 세운 혜양사도 참으로 독특한 절이다. 그림 같은 풍광 속에 대찰(大刹)을 앉힐만할 수만 평 터를 갖췄으되 정작 절집이라곤 소박한 관음전 한채와 그가 기거하는 요사채가 전부다. 전국 사찰들마다 일년 내내 끊임없는 불사(佛寺)로 규모를 늘리고 치장하기 바쁜 터에. 대신 절 앞 마당 드넓은 터에 잔디밭과 공동취사장 등을 갖춘 무료 시민공원을 손수 꾸며 놓았다. 휴일이면 이곳 절 앞마당은 가족 소풍객들로 가득 들어찬다.
"사람들이 마음 편안하게 쉬고 서로를 아끼는 모습을 보면 저게 부처님의 세계다 싶지요. 그깟 시주 몇 푼 더 받겠다고 절을 늘리고 하는 따위는 다 부질없는 짓이지요."
천리향 꽃 향기에 잠긴 혜양사 절 마당에는 동백이 한껏 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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