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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의 길위의 이야기]볍씨를 담그던 날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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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의 길위의 이야기]볍씨를 담그던 날의 풍경

입력
2004.04.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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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 커다란 단지와 함지가 나오고 부엌의 큰 물동이들이 나온다. 아니, 곡간에 잘 보관하고 있던 볍씨부터 내온다. 그 볍씨는 지난 가을 추수 때 알곡이 가장 실했던 것을 따로 베어 보관해온 것이다.그러나 그 볍씨 가마니 안에 들었다 해서 그 속의 알곡이 모두 볍씨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마당에 나온 저 크고 작은 그릇들이 다시 한번 그들을 시험한다. 커다란 함지나 고무대야에 물을 붓고 거기에 달걀이 절반쯤 물 밖으로 떠오를 만큼 소금을 타고, 볍씨를 붓는다. 볍씨들에게 이 시험은 가혹하다. 그냥 맹물이면 가라앉을 볍씨도, 그래서 못자리에 뿌리면 그런대로 싹을 틔울 볍씨들도 이 소금물 시험을 견디지 못하고 물 위로 떠오르고 만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 볍씨를 담근 독에 부정타지 말라고 금줄을 두른다. 힘들게 꼰 왼새끼 사이사이에 꿰어놓은 창호지 조각이 순한 바람에 나부끼고, 햇빛은 그 종이 위에서 배를 뒤집는다. 그것은 한해 농사를 시작하는 성스러운 의식이며 기도였다.

이제는 이렇게 볍씨를 담그지 않는다. 고향의 봄을 떠올리는 나만의 추억 속의 풍경이 되고 만 것이다. 이순원/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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