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 때문에 꼭 가야 할 여행을 취소했다는 친구를 만났다. "노인들은 투표안 해도 된다"는 여당 대표의 말에 반발해서가 아니라 이번 선거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정부 수립 후 치렀던 16번의 총선, 15번의 대선을 돌아보면 유권자들에겐 한결같이 어려운 선거였다. 관권, 금권, 불법이 판치고 온 나라가 지역감정의 포로가 된 적도 있다. 1960년엔 국민이 부정선거에 저항하여 정권을 무너뜨렸고, 87년엔 군사독재에 빼앗겼던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기도 했다.
선거치고 중요하지 않은 선거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이번 선거는 국민이 주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난 선거들과 구별되고, 의미 또한 각별하다. 국회의 대통령 탄핵 후유증으로 쑥밭이 된 정치판을 어떻게 개편할 것이냐는 막중한 권한을 유권자들이 쥐고 있다.
많은 직업 정치인들이 물러났다. 카리스마로 군림하며 수백만 군중 앞에서 사자후를 토하던 '거인(巨人)의 시대'는 가고, 50대의 정치 리더들이 필사적으로 민심에 호소하고 있다. 유권자들은 비로소 명실상부한 주인이 됐다.
유권자들은 어떻게 주인이 되었나. "아니다"라고 말해야 할 때 단호하게 일어섰기 때문이다. 부패의 늪에 빠져 좌표를 잃고 허우적대던 국회가 대통령 탄핵이라는 극단적인 파행을 저질렀을 때 국민이 빼 든 단죄의 칼은 산천초목을 떨게 했다.
탄핵 의결로 의기양양하던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국민의 분노가 치솟자 난파선처럼 흔들렸다. 총선을 앞두고 등 돌린 민심을 되찾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어부지리를 얻은 열린우리당의 파죽지세에 밀리고 있다. 뒤늦게 땅을 치고 속죄하고 삼보일배를 해도 민심은 아직 차갑다.
국민의 무서운 힘에 국민 스스로 놀라고 있다. 이번 총선에서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가 우리의 과제다. 그런 점에서 이번 총선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각 당은 이번 총선을 민주 대 반민주, 탄핵 대 반 탄핵, 보수 대 진보의 대결로 몰아가고 있다. 유권자들은 먼저 이런 식의 이분법에서 벗어나야 한다. 불가피하게 그런 대결의 성격이 있다 해도 그보다는 좀 더 넓고 긴 안목에서 정국을 볼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민주역량을 키우고, 경제가 재도약할 수 있는 역동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런 노력 없이 보수냐 진보냐 집착하고 대결하는 것은 혼란과 분열을 부채질할 뿐이다. 혼란과 분열 속에 일시적으로 뭔가 얻는 세력이 있다 해도 그것이 진정한 힘이 될 수는 없다.
나라의 근본, 사고의 근본을 바로 세워야 한다. 그래야 민주역량이 성장하고, 경제의 토대가 튼튼해진다. 민주주의의 발전은 선거혁명이나 정권교체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군사독재 이후 십 여년의 문민통치 실험에서 절감하고 있다.
독재의 가장 심각한 폐해는 독재자를 닮은 사람, 독재적인 사고방식을 양산하고 전염시킨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도 30년 군사독재의 폐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보수와 진보, 탄핵파와 반 탄핵파, 좌파와 우파 등은 서로 주장과 깃발이 다를 뿐 행태는 비슷하다.
견해를 달리하는 정파를 용납하지 않고 어떻게든 말살하려던 군사독재의 행태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정치안정이나 경제발전은 없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첫걸음이다.
유권자들 역시 그런 행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가족끼리 선거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 유행할 만큼 분열이 심각한데, 이런 분위기에서 투표를 한다면 선거 결과에 어떻게 승복할지 걱정스럽다.
탄핵 의결 후 여론의 흐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보수나 진보, 친노(親盧)나 반노가 아닌 중도의 분별력이었다. 그들은 "노 대통령에게도 잘못이 있다. 그러나 탄핵은 안 된다"는 분명한 소리를 냄으로써 탄핵정국을 정리했다.
이번 총선에서도 중도의 양식과 균형감각이 판세를 가를 것이다. 적개심으로 투표하지 말고,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며 투표해야 한다.
장명수/본사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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