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 발을 들이미는 순간, 그곳은 벌써 경상도 심심산골의 귀기 어린 흉가였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숲 사이로 거대한 목어(木魚)가 극장 3층까지 날아올랐다. 귀퉁이가 무너진 대청마루, 부서진 담벼락, 싸리나무로 문을 단 뒷간, 그리고 장독대가 퇴락한 천석지기의 흉가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3일 막을 올려 11일까지 공연하는 '흉가에 볕들어라'(이해제 작·이기도 연출)의 무대. 구렁이가 하늘을 향해 솟구치고, 귀신과 사람이 얘기를 주고 받더라도 별스럽지 않을 무대가 관객의 눈을 속이고, 대숲 사이에 숨어 기괴하면서도 신비스런 소리를 내는 두꺼비들이 귀를 속였다.
노랫가락처럼 흘러가는 찰진 경상도 사투리, 노련한 한명구와 유수미와 이승준 등 젊은 배우의 궁합도 흉가 분위기를 북돋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오감을 사로잡는다 해도 문제는 시간이다. 과연 두 시간 동안 관객은 귀신의 시간을 살 수 있을까. 자기가 죽은 줄 모르는 귀신들이 서로 멱살잡이를 했고,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살을 섞었다. 이런 시적인 진실을 정말 사실인양 관객이 믿게끔 할 수 있을까.
30년 전 이 집에서 8명의 식솔이 죽는 참화가 일어났다. 사건 나기 직전에 흉가의 전 주인 남부자 귀신(박용수)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파북숭이(한명구)를 오매불망 기다린다. 참화로 죽은 뒤 자신이 죽은지도 모르고 그날 있었던 일을 고스란히 반복하는 잡귀들을 쫓아내기 위해서다. 남부자는 몰살의 현장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파북숭이를 부추겨 참화의 진상을 캐고자 한다. 무대엔 잡귀의 시간, 귀신의 시간, 인간의 시간이 난마처럼 뒤엉켜 있다.
짧게 압축해 지루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압박감 탓인지 극은 빠르게 흘렀다. 정교하게 잘 짠 추리극이었고, 배우들 또한 추리극의 긴박한 호흡에 맞춰 움직였다. 그러나 탐욕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말하는 추리극만은 아니다. 땅문서에 눈이 뒤집혀 삽시간에 식솔끼리 서로를 죽이는 대목은 아쉬웠다. 극의 유장한 정서와 환상성이 사그러들면서 작품에 켜켜이 쌓인 시간적인 두께도 줄었다. 완벽한 추리극을 원했다면, 차라리 극장을 활용한 무대운용과 특수효과를 강화하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LG아트센터가 오늘의 젊은 연극인 시리즈로 준비한 양정웅 연출의 '환'과 더불어 '흉가에 볕들어라'는 참신한 무대와 젊은 연극인의 패기가 돋보였다. 젊은 연극인의 실험정신 앞에서 아직 중년층 관객은 팔짱을 끼고 관망중이지만, 이런 기회가 젊은 연극인을 살찌울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종도기자 ecr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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