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경(53)씨는 새 책 출간을 맞아 7일 상경해서는 평창동의 김종영미술관을 들렀다. 경주에 사는 그는 서울에 올 때마다 화랑을 찾는다. 조소과를 다니면서 조각가의 꿈을 키웠던 그는 우연히 작가가 돼버렸다. 아버지의 파산으로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학 문예공모에 응모한 게 계기였다. "그럼에도 미술의 언제나 나의 일부다. 미술에서 소설의 모티프를 찾고,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고 강씨는 말했다.강씨는 1989년 첫 장편 '가까운 골짜기'를 쓰기 전 원고지 20장 분량의 초고를 써놨다가 "무엇을 얘기해야 할 지 선명하게 잡히지 않아서" 서랍에 넣어뒀다. 문득 주제가 풀려나온 10여 년 뒤 어느날 그는 원고를 꺼냈다. 그것을 다섯번째 장편 '미불'(米佛·민음사 발행)'로 완결했다.
법명이 미불인 이평조는 일흔이 넘어서도 그림에 대한 정열을 불태우는 화가다. 수묵 중심의 동양화가 아니라 구도와 색채를 도입한 한국화를 추구해온 그의 노력은 뒤늦게 평단의 인정을 받는다. 미불이 예술 창작의 동기로 삼는 것은 어린 연인 진아와의 성애다. 진아는 육체를 주는 대신 물질을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하는 젊은 여자다. 수 년 전의 딸과 함께 한 인도 기행을 통해 미(美)와 추(醜), 완전과 불완전함에 대한 체험을 얻고 돌아온 미불은 역작을 쏟아낸다. 그는 진아와 정사를 나누는 한편 경주를 찾아 작품의 모티프를 얻는 데 골몰한다.
강석경씨는 "이 소설의 주제는 사랑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카마수트라와 소녀경, 춘화 등을 참고했다는 적나라한 성애 묘사에 대해서도 "그것이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데는 필연적인 에너지가 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예술과 고통의 관계를 탐구하는 게 소설의 목적이다. 예술가는 인간이기 때문에 불완전한 존재이고, 그 불완전함을 극복하고 구원받는 길은 예술을 통해서 가능하다. 모든 예술은 고통에서 나온다는 것, 예술가에게는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이 예술밖에 없다는 것을 소설에서 말하고 싶었다."
'미불'에서 작가의 주제의식이 폭발하는 것은 마지막 부분이다. 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게 된 미불은 그림 한 점을 팔아 학비와 생활비를 대주는 것으로 진아와의 이별을 준비한다. 진아는 그러나 만족하지 않고 미불의 작품과 집에 대한 가압류 소송을 낸다. 앓고 있는 미불에게서 그림에 대한 열정이 터져나오는 것은 이 순간이다. 기침 속에 쏟아지는 피를 보다가 미불은 붓을 피로 적셔 그림 속 피에로의 옷을 칠한다. '붉은 피가 종이에 번진다. 맨드라미 심장 같은 피가. 부글부글 뜨거운 진채(眞彩)로 빨간 옷을 입히니 피에로가 꿈틀 살아나는 것 같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물감의 꽃밭에서 나팔 불었던 나. 인간의 몸은 빨강이라는데 빨간 나의 몸을 사랑했던 광대 미불.'
강석경씨는 10년째 경주에 머물고 있다. '미불'에는 자신의 전공인 미술과 함께 1980년대 인도기행의 체험, 경주에서의 생활 등이 모두 담겼다. 그는 "경주와 인도는 나의 정신적 고향"이라고 말한다. '경주산책'이라는 산문집도 가을쯤 낼 예정이다. "이 책을 내면 경주에서 할 일은 다 하게 되는 것 같다"는 강씨는 산문집 원고를 탈고한 뒤에는 다시 인도로 떠날 계획이다. "오로빌레라는 공동체 마을에서 1년 정도 체류하면서 휴식을 갖고, 새로운 소설의 모티프를 얻을 것"이라고 그는 밝혔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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