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티즌 사로잡은 '싸이질'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싸이월드'(www.cyworld.com)의 미니 홈피에 디카, 폰카(휴대폰카메라)로 찍은 사진과 이런저런 생각을 올리고 남의 홈피를 열심히 찾아 다니며 글을 남기는 행위를 일컫는 '싸이질'. 600만명에 이르는 싸이월드 회원 중에는 '싸이질'로 날밤 새는 이들도 적지 않아 '싸이폐인'이라는 말까지 나돈다. 이들에게 일기 또는 비망록은 예전처럼 꽃무늬 노트에 소중히 담아 열쇠까지 채워 꼭꼭 감춰두는 '나만의 기록'이 아니다.
미니 홈피에 올린 글과 사진은 서로 내용을 공유하는 '1촌 맺기'와 1촌의 1촌 식으로 끝없이 관계를 이어가는 '파도 타기' 기능을 통해 순식간에 인터넷의 바다로 퍼져나간다. 모 재벌 총수의 딸, 현직 대통령의 며느리, 열애중인 인기 스타의 사생활이 낱낱이 공개된 것이 대표적인 예.
인적네트워크 이론으로 모르는 사람도 6명만 거치면 연결된다는 '6단계 분리 법칙'(Six Degrees Of Seperation)이 있고, 국내에서는 3, 4단계로 좁혀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지만, 이 세계에서는 말 그대로 '한 다리만 건너면 모두 아는 사람'이 된다.
원치 않는 사생활 공개로 인한 부작용이 잇따르자 '펌' 방지 등 개선책도 나왔다. 하지만 대다수 '싸이폐인'들은 공개를 각오하고, 모르는 이들이 보여주는 관심을 즐긴다. 이들에게 사생활은 감춰야 할 것이 아니라, 드러내고 함께 즐기는 '놀이의 대상'인 것이다.
노출은 선택이 아닌 필수?
패션 트렌드에서 노출 여부나 강도는 더 이상 이슈가 아니다. 보여주되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가 관심거리다. 패션 리더들에게 적당한 노출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것이다.
지난해 홈쇼핑 업계를 강타한 '누브라' 열풍을 보자. 끈 없이 양 가슴에 붙여 사용하는 누브라는 어깨는 물론, 가슴 골까지 드러내는 노출 패션의 필수품이 됐다. 불편한 브래지어 탓에 노출을 망설이던 여성들이 앞다퉈 누브라를 사들이고, 그 열풍에 힘입어 노출의 강도가 더욱 높아지면서 과거 패션 쇼나 스타들의 화려한 무대의상에서나 볼 수 있었던 과감한 노출 패션을 이제는 거리 등 공공장소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20, 30대 여성들 사이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반투명 젤리백, 비닐백 등은 가방 속 내용물이 더 이상 '프라이버시'의 대상이 아님을 선언한다. 엉덩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로 라이즈' 청바지가 거리를 휩쓸고, 남성을 위한 노출 패션 아이템도 쏟아지고 있다. '몸짱' 바람까지 불어 땀 흘려 만들고 가꾼 몸을 드러내 보이려는 욕구는 더욱 거세지고 있다.
TV도 노출의 시대
몸이든, 사생활이든, 감춰왔던 생각이든, 거리낌없이 드러내 보이는 '노출 바람'은 보수적인 매체였던 TV에도 변화를 몰고 왔다.
케이블TV 여성채널 온스타일이 방송 중인 '싱글즈 인 서울'은 미혼여성 출연자를 대상으로 시청자 투표를 거쳐 '최고의 싱글'을 뽑는 리얼리티 프로그램. 20, 30대 전문직 여성인 4명의 출연자는 '허리 24, 가슴 36 만들기' 등 과제를 수행하며, 외국 섹스박물관에서 본 남성의 물건을 본뜬 의자, '핍쇼'(동전을 넣고 보는 누드쇼) 구경담, '원 나이트 스탠드'(하룻밤 잠자리)에 대한 생각 등 친구끼리 소곤소곤 나눌 법한 얘기들을 거침없이 풀어놓는다.
얼마 전 성형 등을 통해 새 인생을 찾아준다는 동아TV '도전 신데렐라'의 2기 출연자 모집에는 무려 4,000여명이 몰렸다. 미용 성형이든, 재건 성형이든 변신의 과정이 TV로 낱낱이 공개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열정이 놀랍다.
MBC의 '인터넷극장-러브', KBS2의 '천연 시트콤 대단한 가족' 등 지상파 TV들이 앞다퉈 내놓는 '시청자 참여' 프로그램도 정도는 달라도 일반인들의 적극적인 노출 욕구를 잡아낸 것. 특히 '대단한 가족'은 일반인 가족이 일상에서 겪은 재미있는 사건을 시트콤으로 꾸미고, 직접 연기까지 한다. 드러내기 욕구가 신세대의 전유물이 아님을 보여주는 예다.
문화평론가 박기수씨는 이런 변화의 바람을 "90년대 이후 본격화한 '문화 민주화'의 큰 흐름"으로 해석한다. 문화 소비자에 머물렀던 대중이 문화를 생산하고 소통하는 주체가 되는 '문화 참여의 시대'가 열리면서 자기를 드러내고, 말하고, 보여주려는 욕구가 강해졌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싸이질'에 대해 "전통적 공동체가 무너지면서 직접 소통의 기회를 잃은 신세대가 익명의 공간에서나마 나름의 소통 방식을 찾아낸 것"이라면서 "별 목적 없이 '싸이질'로 밤을 새고 무심코 행한 노출의 파장을 감당하지 못하는 등 부작용도 있지만, 스스로 거르고 대안을 찾아가는 문화적 자정능력이 충분하다고 믿는다"고 덧붙였다.
/이희정기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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