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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싶은 얼굴/"계란 할아버지, 그땐 잘못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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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싶은 얼굴/"계란 할아버지, 그땐 잘못했어요"

입력
2004.04.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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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교 1학년쯤 됐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우리 동네에는 다리를 쩔뚝이며 곱사등에다 지게에 온갖 잡화를 얹고 온 마을을 돌던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습니다. 지게 위 목판에는 엿, 바늘, 실, 구리무(화장품), 단추, 술약, 소독약, 실타래, 시커먼 빨래 비누, 사카린, 작고 예쁜 계란이 얹혀 있었습니다.갖가지 잡화를 곡식이나 병, 고무신, 찌그러진 냄비 등과 물물교환했던 시절입니다.

짚에 싼 계란 꾸러미는 아버지 상과 귀한 집 자녀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동네에 가위 소리가 들리면 언제나 우리집 안마당은 시끌벅적해졌습니다.

할아버지가 가위를 흔들어 대면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구경꾼이 몰려들었지요. 가끔 어머님들은 머리카락을 잘라 팔기도 하셨습니다.

그 날 따라 유난히 멋있어 보이던 삼촌이 계란 하나를 사서 모서리에 구멍을 뚫고 쪽 빨아 먹고 버리는 모습에 나는 호기심이 발동해 계란 꾸러미를 향해 슬그머니 손을 내밀었습니다. 계란을 치마 밑에 숨기고 숨을 곳을 찾던 나는 돌부리에 채여 넘어지면서 계란이 땅바닥에 박살이 났습니다. 가슴은 콩닥거리고 손과 발은 겁에 질려 얼어붙은 듯하고 이마와 등줄기에는 연신 식은 땀이 흐르고 누가 나를 보지 않을까 조마조마 하며 냇가로 달려 시간은 십 년이 넘는 것 같았습니다.

아직도 나는 날계란을 잘 먹지 못합니다. 그 이후로 나는 할아버지 앞에 나설 수 없었고 동네에 가위 소리만 들리면 방으로 기어들었습니다.

물 한 그릇이라도 대접해 보내야만 속이 편하시다는 어머님은 늘 할아버지를 대접하셨기에 우리는 가끔씩 엿가락을 얻어먹는 횡재를 했습니다.

그날 이후 난 먹고 싶고 보고 싶은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졸이던 가슴은 어느 때부터인가 들려 오지 않는 가위 소리를 기다렸지만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풍문만이 들려 올 뿐 지게는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계란 하나 사서 어른들 대접하고 빈 계란 속에 쌀을 조금 넣고 장작더미에 얹어 밥을 해 먹으면 꿀맛이던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이제 계란을 한 판씩 사다 놓아도 누구 하나 눈길 주는 이 없고 손님상에 넣으려면 조류독감 때문에 물어 보고 넣어야 될 만큼 인기 없는 메뉴가 돼 버렸습니다.

왠지 계란만 보면 생각나는 할아버지. 지금 잘못했다고 빌면 "용서하마 얘야. 난 모른데이. 고맵다"고 하실까? 오늘은 그 할아버지가 더욱 보고 싶어집니다.

/sorry54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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