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뜻 집채만한 몸집을 보고 재개발 현장에 흔한 '어깨'의 느낌을 받았던 사람들은 그가 90년대 여자배구 슈퍼스타 장윤희의 스승임을 알게 되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전주 근영여고를 명문으로 키우고, 여자 청소년 대표팀을 지휘했던 이점세(49·李点世)감독. 169㎝의 단신으로도 '여자 배구 역대 최고의 선수'로 불리며 10년간 코트를 호령한 '짱돌'장윤희는 그의 대표작이었다. 그러한 명장이 슬그머니 코트를 떠나더니 요즘 엉뚱하게 부동산 개발 전문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직함은 르메이에르건설(주) 상무. 최근 2,700여 평의 종로구 청진6지구 재개발을 맡아 여기에 인근 교보빌딩과 같은 규모의 주상복합 건물을 세우는 초대형 프로젝트를 완성하고 2006년 완공목표로 공사에 들어갔다.
배구밖에 모르던 그가 코트가 아니라 재개발을 지휘하게 된 것은 당시 중고배구연맹 회장이었던 정경태 르메이에르건설 회장(현 대한배구협회부회장)의 손에 이끌려서 였다.
94년 심판으로서 일본의 한 대회에 참가했던 이감독은 한국선수단 단장인 정회장과의 첫 만남에서 단번에 눈에 찍혔다.
듬직한 체구와 호방하면서도 치밀한 성격을 평가한 정회장이 함께 일할 것을 제의했고, 이감독은 청소년대표팀 코치로 세계대회 3위, 감독으로 세계대회 예선 통과를 이룬 후 3년 만인 97년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총무부 차장으로 입사해 분위기를 익히고는 1년 만에 기획실 부장을 맡으면서 부동산 개발분야의 대가인 정회장의 지도로 빠르게 실력을 쌓았다. 직급도 이사를 거쳐 기획 및 자금담당 상무로 고속 승진했다.
"쓸만한 땅을 찾아내고, 정보를 얻기 위해 서울 시내를 매일 샅샅이 뒤지고 다녔습니다. 땅을 매입하는 데는 보통 인내가 필요한 게 아니더군요. 수많은 지주들의 비위를 맞추며 끈질기게 설득하고, 안 되면 인간적인 호소를 하며 매달렸습니다. 이 쪽 업계의 특성상 상대에게 믿음을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데 스포츠맨 출신이라는 점이 큰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고요."
그 결과 처음 사당 4거리에 오피스텔과 상가를 짓고, 신촌의 요지에 27명이나 되는 지주를 설득해 역시 주상복합 건물을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모 대기업이 갖고 있던 사옥부지와 주변 자투리 땅들을 매입한 후 복잡한 세입자 문제까지 해결, 최근 결실을 본 청진 6지구 재개발이 세 번째 작품.
청진동 재개발은 자신에게 '배구판의 장윤희' 같은 최고 역작이 될 것이라며 흐뭇해 한다.
그는 변신에 성공한 비결을 운동에 비유, 잠재능력을 발견하고 이끌어 준 지도자(정경태 회장)와 운동을 통해 몸에 밴 집념·끈기의 덕분이라고 설명한다.
그 집념과 끈기는 85년 한차례의 우승 경험도 없는 근영여고를 맡아 바로 다음해 종별선수권대회 정상에 올리는 등 10년간 11차례 우승하며 줄곧 4강권을 지킬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이었다.
"선수들은 키가 작아 블로킹이 안 되니 상대방이 때리다 지칠 때까지 걷어 올리도록 혹독한 수비 훈련을 하고, 공격에서도 단신의 불리를 극복할 수 있는 타법을 익히기 위해 두배의 노력을 했어요. 장윤희가 3학년 때 우승해도 키가 작아 선뜻 데려 가겠다고 나서는 팀이 없었지만 LG정유에 입단하자 마자 공수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겨울시리즈 9연패의 주역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는 자신이 배구계를 영원히 떠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시간이 허락하면 어머니 배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제자들의 요청대로 '근영 OB'팀 벤치를 맡고 싶고, 청진동 재개발 사업 완수 후에는 '기업에서 번 돈을 스포츠 발전을 위해 투자하겠다'는 정회장의 뜻에 따라 국내 최고의 배구 팀을 만들어 직접 운영해 보겠다는 포부도 갖고 있다. sky@hk.co.kr
■1973년 4월 9일-사라예보 승전보에 국민들 열광
건국 후 한국스포츠 최대의 쾌거였다. 일제 때 손기정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 66년 장창선의 세계레슬링선수권 우승이 있었지만 구기종목의 제패는 사상 처음이었다.
유고의 고도 사라예보에서 날아 온 승전보는 아침 신문 1면 톱을 장식하며 국민들을 열광시켰다. 귀국 선수단의 카 퍼레이드가 펼쳐진 김포공항에서 시내까지의 연도에 수십만명이 나와 오색종이를 날렸고 시청앞에서 거국적인 환영식을 벌였다. 대통령은 선수단을 환영식후 곧바로 청와대로 불러 공로훈장을 수여했다.
한국은 6개 팀이 싸우는 B조 예선에서 전대회 챔피언인 중국을 3-1로 제압하며 기세를 떨쳤다..
중국은 대회 직전 국제탁구연맹이 발표한 세계랭킹에서 1∼4위를 휩쓴 초강국. 5위가 일본의 오제키, 6위가 이에리사 (현 용인대 교수)였다. 그러나 이에리사와 정현숙이 단식을 내리 따내고, 복식(이에리사-박미라)을 내준 후에 다시 이에리사가 단식을 이겨 예상 밖의 낙승을 거두었다.
이어 결승리그 마지막 상대는 일본. 이에리사가 요코다를 가볍게 누른 후 정현숙이 상대 에이스 오제키에 져 1-1이 됐으나 이에리사는 박미라와 함께 복식을 따내고 단식서도 오제키를 눌러 3-1로 승리를 결정지었다.
갓 고등학교(서울여상)을 졸업하고 신탁은행에 입단한 이에리사는 단체전서 단식을 한 번도 지지 않는 기적 같은 승리행진을 펼쳤다. 2년 전 고교 2년생으로 대선배 최정숙과 함께 출전, 준결리그서 일본에 단식 2경기를 모두 빼앗겼던 이에리사가 세계최강으로 자리를 굳히는 순간이었다.
■1984년 4월 5일-中선수단 첫 내한에 대만팀 철수
한국 데이비스컵 테니스단이 사상 처음 중국에 들어가 변방 쿤밍(昆明)에서 경기를 한 데 이어 한달 여 만에 중국 농구선수단이 서울의 제8회 아시아청소년 선수권대회에 출전, 양국의 스포츠 교류가 급진전됐다.
34명으로 구성된 중국 남녀선수단은 홍콩을 거쳐 대한항공편으로 입국했다. 2m대 선수가 즐비한 장신군단은 매스컴의 집중 조명 속에 연습장, 백화점, 고궁 등 가는 곳 마다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대만 선수들이 경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대회를 보이코트 하고 철수하는 불상사가 발생, 명암이 엇갈렸다.
개막식에 중국이 오성홍기를 들고 입장하는 것에 불만, 개막식에 참석하지 않았던 대만은 갑작스럽게 '본국 협회의 훈령'이라며 주최측에 경기포기를 통보했다.
대만은 "경기장 안팎과 입장식, 시상식에서 전혀 국기사용을 하지 않았던 83년 홍콩 아시아선수권대회의 방식에 따라 대회진행을 하겠다는 조직위의 약속을 받고 출전했는데 지켜지지 않았다"고 포기 이유를 밝혔다. 조직위는 중국이 국제농구연맹의 규정과 국제관례를 들어 국기게양과 국가연주를 강력히 주장하자 "개회식에는 국기를 들고 입장하지만 경기장 안팎에는 국기를 게양하지 않고, 시상식때만 우승국의 국가를 연주하고 국기를 게양한다"는 절충안을 내놓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무튼 한국은 중국의 환심은 샀으나 오랜 우방인 대만을 잃은 셈이었다.
경기에서 한국은 허재의 활약으로 중국을 74-69로 꺾어 첫 우승을 차지했으며 여자는 중국에 이어 준우승을 했다.
■1966년 4월 14일-두번째 IOC위원 이상백씨 별세
우리 체육계의 선각자인 '상백(想白) 이상백(李相栢)'은 64년 이기붕 전 부통령에 이어 두번째로 IOC위원의 영예를 안았으나 2년 만에 6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애국시인 이상화의 동생인 이상백은 광복 후 한국체육의 재건과 올림픽운동에 앞장서며 국제화에 심혈을 기울인 체육인이자 학자로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회학의 태두였다.
대구고보에서 연식정구를 하고,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시절 농구부를 창설해 주장을 맡으며 2개월간 미국을 순회하는 원정경기를 주도했던 그는 일본 농구협회를 설립한 뒤 36년 베를린올림픽 선수단 총무를 거쳐 일본체육회 전무에 오르는 등 한국인이면서도 일본체육계를 이끈 거물이었다.
손기정을 비롯한 한국 선수들이 비록 일본팀 소속이었지만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노력에 의해서 였다.
45년 광복과 함께 경성대학 교수에 부임, 47년 사회학과를 창설하는데 앞장서고 한국사회학회 초대회장을 맡을 정도로 다방면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친 그는 조선체육회의 모체인 조선체육동지회를 결성하여 위원장에 취임했으며 52년 15회 헬싱키올림픽 한국대표단 총감독, 16회 멜번 및 17회 로마올림픽 단장에 이어 64년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과 IOC위원으로 피선됐다.
그는 서울대 문리대에서 수업준비를 하던 중 쓰러져 열흘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시아경기연맹은 아시안게임 대회 최우수선수에게 '상백컵'을 수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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