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대 총선전이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후보들로부터 "못해먹겠다"는 아우성이 터져나오고 있다. 새 선거법이 낯설고 적응하기 어렵다는 하소연 만은 아니다. 너무 이상적으로 만들어진 나머지 유권자에게 최소한의 정보조차 알리기 어렵다는 비판이 잇따르고 있다. 특히 신인들은 불만이 이만 저만 아니다. 정당·합동연설회가 없어져 얼굴 알릴 기회가 대폭 줄어든 데, 법마저 후보들을 옥죄고 있기 때문이다.◎나를 어떻게 알리나
서울에 출마하는 모 후보자는 최근 황당한 일을 당했다. 선거운동원 3명과 선거사무소가 있는 빌딩 식당을 찾아 늦은 저녁을 해결하려는데 갑자기 선관위 직원들이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빌딩 내 상인이 불법모임이라고 신고한 것이다. 후보를 지켜보는 감시망이 지역 선관위의 부정선거감시단, 상대후보 운동원, 일반 시민 등 이중삼중으로 촘촘하다는 반증이다.
문제는 감시는 엄격한데 유권자와 접촉할 통로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후보만 명함을 나눠줘야 한다' '3명 이상 무리 지어 다녀도 안 된다' 등 규정이 너무 까다롭기 때문이다. 경기도의 한 후보는 "움직일 때마다 선관위 자문을 받아야 된다"면서 "적극적인 선거운동은 꿈도 못 꾼다"고 푸념했다. 서울의 한 후보도 "방송토론회를 한다지만 지역 케이블 TV를 보는 사람이 얼마나 되냐"면서 "동별 3명씩 유급 선거운동원을 고용해놓고 할 일이 없어 돈만 축내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무용지물 인터넷
선거법이 온라인은 풀었다지만, 후보들은 인터넷 선거운동에 대해 고개부터 젓는다. 인터넷은 대선에 어울리지 총선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경기지역의 한 후보는 홈페이지에 홍보성 글 몇 개 올리는 게 온라인 선거운동의 전부다. 그나마 홈페이지를 찾는 일반 유권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방문자수가 하루 평균 25명 정도.
이메일을 보내고 싶지만 지역 유권자의 주소를 알길 이 막막하다. 경기지역 다른 후보는 "유권자들 이메일 주소집을 들고 와 몇백만원씩에 사라는 사람들이 판을 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지역 한 후보는 "인터넷은 '알바'(아르바이트생)끼리의 싸움"이라고 단언했다.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글 대부분은 상대후보가 고용한 아르바이트생의 비방이라는 것이다. 경북의 모 후보는"며칠 해보니 개정 선거법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주의 선거법"이라고 비판했다.
◎선거운동 대신 한 건 잡기
아예 선거법을 역이용하는 후보도 있다. 자신을 알리기보다 상대후보를 감시하는 데 전력을 쏟는 경우가 나타난 것이다. 서울의 한 후보는 지지율이 떨어진 상대 후보측이 선거운동을 포기한 뒤 자신을 미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가슴을 쓸어 내렸다. "큰 건 하나만 잡으면 선거운동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이 같은 행태는 판세 차이가 큰 지역일수록,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기승을 부릴 것으로 보인다.
/이동훈기자 dhlee@hk.co.kr
고주희기자 orwell@hk.co.kr
■심심한 선관委 / 50배 포상금·과태료 위력 공식운동기간 고발 3건뿐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선거사범이 줄어드는 새 현상 때문에 중앙선관위가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다. 선거운동이 시작된 2일부터 5일까지 나흘간 선관위가 검찰에 고발한 선거법 위반사건은 단 3건. 이에 앞서 1월1일부터 1일까지 3개월여 동안에는 고발 건수가 238건에 달해 하루 평균 2.6건의 선거사범을 검찰에 넘겨왔다. 평균 고발건수가 선거전 개시와 함께 7분의 1로 줄어든 셈이다.
선관위 관계자들은 "이런 선거는 처음"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막바지에 선거전이 치열해지면, 사건접수가 늘어나고 일도 바빠지는 게 통례였기 때문이다.
6일 선관위에 따르면 가장 악성적인 위반행위인 금품·향응제공은 발생시점을 기준으로 지난해 12월 71건, 올해 1월 91건, 2월 154건 등으로 다달이 늘다가 3월 들어 79건으로 줄었다. 최근에도 사법처리되는 선거사범이 잇따르고 있지만, 이들은 대부분 지난달 또는 2월중 접수분이라는 설명이다.
이러한 수치변화는 선거현장에선 피부로 체감된다. 서울 K선관위 김모 지도계장은 "요즘 바쁜 일이 없다"면서 "주민신고나 적발사례 등이 거의 10% 수준으로 줄었다"고 말했다. 다른 선관위 관계자는 "예전엔 선거운동기간에 들어서면 운동이 격렬해져서 주로 현장을 누비고 다녀야 했다"면서 "이번에는 후보들이 몸을 사려 우리도 사무실에서 주로 일을 보고 있다"고 말했다.
가장 큰 공로자는 역시 '50배 포상금·과태료제'. 서울 S선관위 이모 주임은 "'걸리면 건다'는 인식이 퍼져 주민들끼리 순수하게 모여 식사를 하거나 놀러 가는 것조차 조심하고 있다"면서 "제보자들이 너무 대어(大漁)를 노려 잡어를 다 놓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농담을 할 정도"라고 말했다.
선거부정감시단원 권모(28·대학생)씨는 "1일까지 활동했던 1차 선감단원들은 위반사례를 적발해 일당을 더 타간 단원이 많았다"면서 "2차 선감단원 가운데 '보너스'를 받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신고를 받고 나가봐도 선거법을 몰라서 한 오인신고가 대부분"이라며 "단원들의 활동도 위법사례의 적발보다 후보자를 따라다니는 등 부정선거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선관위 관계자는 "선거 1주일 전이면 금풍 향응이 집중 제공될 때인데 조용한 것을 보니 클린선거가 정착될 가능성이 보인다"면서 "그러나 후보자들이 막판에 기회를 보고 있을 가능성도 있어 경계를 늦추지는 않고 있다"고 말했다.
/김동국기자 dkkim@hk.co.kr
■상대 실수만 기다리는 "손가락질 선거" 한심한 정당들
이번 총선이 상대방의 패착이나 실수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반사이득을 얻는 '손가락질 선거'로 흐르고 있다.
6일 현재까지 판세에 영향을 미친 대형 이슈로는 탄핵과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의 '노인폄하 발언' 등이 꼽힌다. 우리당은 거센 탄핵 역풍에 힘 입어 지지율이 급등한 이후 줄곧 전국적 우세를 유지하고 있고, 한나라당은 정 의장의 실언 덕분에 반등의 계기를 잡았다. 또 '부자 몸조심'을 하던 우리당은 탄풍(彈風)이 사그러들자 5일부터 '탄핵철회 대표회담 제안'이라는 포장만 덧씌워 불씨 되살리기에 나섰다.
각 당이 스스로 개발해낸 이슈가 아닌 상대 당의 헛발질을 득표동력으로 삼고 있는 셈이다. 때문에 지난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측의 '신행정수도 충청권 이전'처럼 선거전을 주도할 만한 폭발성 있는 공약이나 16대 총선 때 한나라당이 제기한 '국가부채 논쟁' 등 정책현안에 관한 이슈는 이번 선거에선 등장하지 않고 있다.
한나라당과 우리당이 '200석 거여(巨與) 견제론'이나 '거야(巨野) 부활론' 등으로 상대의 힘을 가당치도 않게 부풀리며 엄살을 떠는 것도 표를 공짜로 얻겠다는 얄팍한 계산에 다름 아니다.
이 같은 여야의 안이한 접근자세는 각 선거구의 국지전에도 영향을 미쳐 한동안 잠잠하던 흑색선전과 무책임한 폭로, 색깔론 등 구태를 재발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물론 감성적 이슈에 민감한 유권자들의 투표행태가 이런 경향을 부추기는 측면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도 총선 이후 국민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이처럼 무관심한 선거는 전에 없었다는 비판을 피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유성식기자 ssyoo@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