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당말기 4·19가 일어날 무렵까지는 이승만(李承晩) 정권에 반대하는 야당과 일부 종교인 지식인 언론인의 반독재투쟁이 있었을 뿐, 종교를 배경으로 한 봉사단체나 정권의 비호를 받는 반공청년단체 외에는 시민운동이나 사회운동이 거의 없었다. 4·19 한 달 후인 1960년 5월 가까운 이들 몇 명이 나를 찾아왔다. 학생들이 나라를 바로 잡는 일에 나서 독재를 물리쳤는데 우리 30,40대는 부끄럽지 않느냐, 이런 변혁기에 새로운 역사를 열어나갈 시대 정신을 찾아 선구적 역할을 하는 운동을 펼쳐보자는 것이었다. 청년교육기관 '신생숙'(新生塾)을 운영하는 김일남(金日男)과 김용준(金容駿) 고려대 교수, 국회 사무총장으로 있던 이호진(李鎬賑) 등이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오월회'(五月會)이다.내가 살고 있던 남산의 대한적십자사 사택에서 첫 모임을 가졌다. 그 때 참석한 사람이 조향록(趙香祿) 목사, 엄기형(嚴基衡) 경향신문 논설위원, 이병호(李炳鎬) 서울대 교수, 김일남 신생숙장, 김용준 교수, 홍상규(洪相圭) 전 오사카(大阪)예술대 교수 등 10여명이었다. 첫 모임에 함석헌(咸錫憲) 선생을 모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뒤로는 매주 수요일마다 주로 명동 YWCA에서 모여 열심히 대화하며 연구 토론을 벌였는데 차츰 참가자가 늘어 40명 가까이 됐다. 후에 부총리가 된 이한빈(李漢彬), 이희호(李姬鎬) YWCA총무, 김정례(金正禮) 여성유권자연맹 위원장, 박익수(朴益洙) 서울대 교수, 홍상규 교수, 이정희(李貞姬) 여성연합회 총무, 이종호(李鍾浩) 부산일보 서울지국장, 사업가 김쾌식(金快植), 김태길(金泰吉) 서울대 교수, 안이준(安二濬) 변호사, 시인 황금찬(黃錦燦) 등 그 때로서는 비중 있는 양심적인 지식인들이었다.
강사로 초대된 분들로는 곽상훈(郭尙勳) 국회의장, 박종홍(朴鍾鴻) 선생, 오종식(吳宗植) 한국일보 주필, 각국 대사 등이었다. 민주 발전과 문화 다원주의 등 한국이 당면한 문제와 발전 방향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해나갔다. 내가 간사를 맡아 기록을 담당했는데 지금도 그 때의 토론기록을 갖고 있다.
그 때 내각의 사무처장으로 있던 정헌주(鄭憲柱)씨가 효성그룹의 창업주인 조홍제(趙洪濟)씨를 소개해 주었다. 우리의 활동을 도와주겠다고 해 간행물도 내기로 하는 등 얘기가 구체적으로 되어가는데 5·16이 터졌다. 군정 당국은 이런 종류의 집회를 못하게 했다. 그래서 저녁 먹는 친목회로 한 달에 한 번씩 모였다. 그런데 우리와는 관계없는 군 출신 인사들이 '5월동지회'란 것을 만들었다. 괜한 오해를 받을 것 같아 '수요회'로 이름을 바꿔 모이다가 그것도 불편해 등산 모임으로 바뀌었다. 당시 만난 사람들 가운데는 그 후 시국에 대한 견해가 달라져 일부는 입각도 하고 국회의원도 했으나, 지금까지도 순수하게 사시는 분도 있고, 더러는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그때 모인 사람들은 대체로 5·16 쿠데타에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감시를 받기는 했지만 군정세력이 우리를 붙잡아갈 일은 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이른바 '족청계 반혁명 사건'이 일어난다. 5·16 주도세력은 '족청계'(조선민족청년단 출신들)를 경계했다. 박병권(朴炳權) 강영훈(姜英勳) 안춘생(安椿生) 최영희(崔榮喜) 장군 등 군 내부에도 족청 출신들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군정 당국은 일부 족청계 인사들이 5·16 세력을 비판하고 다니는 것을 잡아다 족쳐 '족청계 반혁명 사건'을 만들었다. 이범석(李範奭) 장군의 측근인 김정례씨 등 몇 명이 주모자로 몰려 혁명검찰부에서 이범석 장군과 연계가 있는가를 추궁 당했지만 별다른 증거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은 반혁명 혐의로 10∼15년의 중형을 받았다. 족청 훈련소 출신들이 나에게도 가끔 들러 5·16세력에 대해 비판을 하는 말은 여러 번 했으나 나는 "적십자인이고 정치에는 참여할 수 없다"며 같이 어울리지 않았다. 그 때 혁명검찰부에서 나도 의심했을지는 모를 일이다. 어쨌든 무엇이든 조금만 잘못하면 걸리는 시절이어서 오월회도 지속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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