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드스타일리스트 오정미씨는 "한국에도 이런 그릇이 있다니 놀랍다. 너무 아름답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그릇은 옻칠을 한 목기 발우로 외국에도 수출된다. 미국 수출가는 1,200달러.이 그릇은 지름 21.5㎝부터 9.2㎝의 그릇을 일곱개 포갠 것으로 접시 대용으로도 쓸 수 있는 뚜껑이 달려있다. 그릇 사이 틈이 1㎜.
꼭 맞는 그릇이 참 신기하게도 생겼다.
이 발우를 만든 장인은 노동부가 지정한 목기 명장 1호인 서태랑(63)씨. 놀랍게도 그에게는 오른 손이 없었다. "잘한다는 말을 듣기는 어렵지만 손이 저러니까 못한다는 말을 듣기는 쉽잖아요. 그런 소리 듣기 싫어 노력을 많이 했어요"라고 서씨는 말했다.
경남 함양 출신인 그는 중학 과정인 함양 고등공민학교 2학년때 여름 동네 강에서 물고기를 잡는다고 사제폭탄을 터뜨렸다. 1955년이니 전후의 한반도 곳곳에는 불발탄과 화약이 흔했다. 그런데 던지려고 하는 순간 폭탄은 터져버렸고 그는 기절해버렸다. 깨어나보니 열 네살 소년의 오른 손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손을 뵈주기가 싫어 그는 학교도 포기했다. 혼자서 집에 있기를 여러 날, 가버린 손이 돌아올 리도 없고 그는 왼손이라도 잘 쓰자고 글씨 쓰기를 시작했다. 한글만 쓴 게 아니라 획수가 많은 한자도 꾸준히 썼다. 어느 순간 오른손만큼 글씨가 잘 써진다고 느껴지자 그는 아버지에게 목기 공방에 가서 일을 배우겠다고 했다.
지리산 자락인 함양에는 목기 공방이 많았다. 그의 아버지는 옻칠을 채취하던 장인으로 목기 장인들과도 친했다. "아버지가 제 자존심 상할까봐 그랬겠지요. '후제(나중에) 해라' 그러시더군요. 그래도 계속 졸랐지요." 아버지는 아들을 목기 깎는 장인(이복우씨)에게 데려갔다. "스승님도 처음에는 '나중에 하라'고 하더니 하도 조르니까 '일단 보내보라'고 하셨다더군요." 그 때가 열 다섯 살 때였다.
목기를 깎는 과정은 어찌 보면 단순하다. 우선 톱으로 나무를 적당한 크기로 자른 후 띠톱(재단기)으로 그릇 모양과 얼추 비슷하게 깎는다. 이때 나온 백골(나무그릇본)을 처음 자른 것이라고 하여 '초갈이'라고 부른다. 이 그릇을 다시 정교하게 깎은 것은 두번 갈았다고 하여 '재갈이'라고 부른다. 재갈이에 옻칠을 하면 목기가 완성된다.
그러나 재갈이를 깎는 작업은 갈이틀에서 계속 돌아가는 목기에 칼대를 들이대어 순식간에 옆과 바닥의 살(두께)을 똑 같게 깎아내야 하므로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작은 그릇이 꼭 맞게 큰 그릇에 포개져야 하는 발우 같은 것은 1㎜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다.
목기를 깎아내는 칼대는 30㎝ 정도의 나무막대기에 12㎝ 정도의 조각도 모양 칼날을 꼽아서 만든다. 기역자로 길게 굽은 속칼은 속을 파낼 때, 끝이 살짝 삐친 등칼은 겉을 깎을 때 쓴다. 매끈하게 할 때는 매칼, 홈을 팔 때는 홈칼, 꼭지를 깎거나 홈의 속을 파낼 때는 귀칼, 큰 함지박 같은 것을 깎을 때는 평칼을 쓴다. 칼대가 크고 무겁기 때문에 한 손으로는 균형잡는 것이 어렵다. 그런데도 그는 잘린 오른 손 손목부위로 칼대 받침인 '우마'를 잡고 왼손으로는 칼대를 잡아 목기를 깎아나간다. 칼밥이 빠져나가는 모양만 보고 있어서는 그에게 오른 손이 없다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처음에는 칼이 툭툭 튀기도 하니까 다칠까봐 무섭지요. 그런 공포심이 사라지는 순간이 바로 일이 손에 익은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에게는 그 순간이 5년 정도가 지나서 왔다고 한다.
물론 처음부터 재갈이를 깎은 것은 아니다. 그가 열심히 하자 스승은 1년만에 "네가 초갈이를 해오면 내가 사꾸마(사마)"하고 독립을 시켰다.
스승은 그의 초갈이를 1년 정도 지켜보더니 칼대 대는 게 능숙해보였던지 '초갈이 말랐으면 재갈이 해보지'하면서 재갈이 하는 법을 일러주시기 시작했다. 살을 위 아래 똑같이 잡지 않으면 그릇이 터진다, 물버들(수양버들) 나무는 옻칠에 담그고 박달나무는 붓으로 칠해라, 물버들도 가지가 꼬불꼬불한 것은 못 쓴다 같은 제작의 비법부터 칼대를 만드는 법까지 다 배웠다.
이후로 그는 칼대까지 직접 만들어 쓴다. 쇠를 사다가 담금질을 하고 두드리고 자르고 하여 칼날을 만든 뒤 나무에 끼우고 매듭까지 감아주어야 완성인데 그렇게 힘들여 만들어도 한 두 달이면 날이 나가서 새로 만들어야 한다.
재갈이에 3년이 넘으니 스승은 '제자가 스승 잡아먹는다더니 이런 건 잘했네'하고 칭찬을 해주더란다. 그 후로는 그의 소문이 나서 대전에까지 불려가서 일을 해주기도 했다. 84년에는 한국민속촌에 있는 전통공예품 시연장 겸 판매장인 한국공예에서 불러 서울까지 올라왔다. 89년 민속촌을 나와 독립했다.
이 무렵을 전후해서 그는 목기 제작 공정을 개량하는 데도 크게 이바지했다. 우선 초갈이 목기를 자르는 본을 만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장인들은 목기를 만들 때마다 컴퍼스를 갖고 일일이 원을 나무에 그렸다. 서씨가 만든 목기본은 목기 크기대로 자른 원형 나무판에 손잡이를 붙인 단순한 형태지만 나무 위에 올려놓고 띠톱에 대면 그 형태대로 나무를 자를 수 있어 편리하다.
두번째로는 옻칠을 갈아내는 사포질을 기계로 대체했다. 보통 목기는 옻칠을 아홉번 정도 하는데 한번 칠 할 때마다 갈아내서 새 칠이 잘 붙게 해야 한다. 사포질 기계라고 해야 갈이틀과 똑같이 모터로 그릇을 돌려주는 기계에 불과하지만 이 것도 서씨가 시작하기 전까지는 일일이 사람 손으로만 했던 모양이다. "기계로 하니까 사람 7명이 일하는 걸 혼자서 할 수 있더라고요. 기계로 일정하게 돌리니까 사포질도 더 깔끔하게 되지요."
그는 그의 목기가 명품이 된 이유로 "옻칠을 아끼지 않고 쓰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목기가 주로 제기로 쓰이는데 제기는 한 가문이 대를 물리는 그릇이다. 정성들여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옻칠을 아끼지 않아야 피막형성이 잘되고 그래야 대를 물려 써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그릇이란 가구와 달리 물과 사람 손이 닿는 것이기에 싼 칠을 하면 칠이 그릇에서 떨어져나간다." 전통대로 만들면 명품이 되는데 공예인들이 그걸 간과해서 다시는 목기를 돌아보지 않게 만든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심지어 은행나무로 만든 목기는 아예 옻칠에 푹 담근다. 은행나무는 수분이 많아서 빨리 마르고 그 마른만큼 옻칠을 흡수하기 때문이다. 옻칠을 흡수한 목기는 옻칠이 발린 목기보다 더 견고하기 때문에 그는 박달나무나 단풍나무보다 은행나무 소재를 선호한다.
원래 전통의 목기 재료로는 버드나무가 많이 쓰였다. 흔한데다 무르고 섬유질이 많아 가구재로는 적당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은행나무 역시 무르고 섬유질이 많아서 옻을 잘 흡수한다"고 말했다. 그는 쓸모없다고 버려지는 은행나무에서 버드나무와 같은 성질을 발견하고 목기재료로 쓰기 시작했다. "생칠에 담그면 쫙 빨아들이는 소리가 나요." 그래서 단단한 나무에 했을 때보다는 칠이 1.2배 정도는 더 들지만 벗겨지지 않는 효과를 감안하면 그 정도는 아깝지 않다고 했다.
오른 손이 없어서 오늘에 이르는 데 불편했을까. "어려서 사고를 당하고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서 부모 가슴에 한이 되게 했는지는 몰라도" 일하는 데는 불편이 없었다고 했다. 칼을 다루는 장인들치고 다쳐보지 않은 이가 드문데 그는 한번도 다쳐본 적이 없다고 한다. 아마도 오른손이 없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서 작업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는 왼손이 없는 청년을 제자로 받아들여 키운 뒤 최근에 독립시켰다. 93년 봄부터 이듬해 봄까지는 중국 지린성에서 조선족 청년들에게 목기 깎는 법을 가르쳤던 적도 있다. "언젠가는 시설을 잘 갖추고 장애인들을 가르쳐 보고 싶다"고 했다.
hssuh@hk.co.kr
●공예품 수출업체 "비움"/현대적 디자인 가미… 日에 매장, 美엔 대리점통해 판매
서씨의 목기가 미국에까지 진출하게 된 뒤에는 '비움'이라는 전통공예품 수출업체가 있다.
비움은 1998년 이래 목기 나전칠기 두석 자기 보자기 죽세공품 한지공예 서각 같은 전통공예품을 외국에 수출하고 있다.
2001년에 정식 출범하며 미국 뉴욕 맨해튼에 매장을 열었으나 9.11 여파로 접었다. 대신 미국시장은 대리점을 통해 판매하며 2003년도에 일본 도쿄에 가까운 나쓰에 매장을 열었다. 현재 유럽에 동포가 매장을 준비중이다.
이곳의 특징은 전통공예품에 현대적인 디자인을 입힌다는 것. 대표 디자이너인 은병수(45)씨는 서울대 미대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미국 프랫인스티튜트 대학원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다.
그는 "외국에서 보니까 세계인들과 경쟁하려면 역시 고유성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전통공예품에서 최고의 장인들을 찾은 끝에 현재와 같은 주력상품을 선정했다"고 말했다. 그는 현대적인 디자인을 제시하는 것 말고도 장인들이 손맛이라고 말하는 '거친 마무리'를 국제표준의 관점에서 보정하는 작업을 많이 한다고 했다. 목기 경우 그릇 두께를 좀더 얇게 하고 칠을 무광으로 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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