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봄, 부산 초량초등학교 4학년 교실. 점심 시간 도시락을 꺼내놓고 먹는데 교실 밖에서 악동 다섯이 나를 기다린다. 당시 그들은 나를 '현대극장'이라고 불렀다."야! 현대극장, 빨리 나온나!" 오로지 영화를 보겠다고 학교도 땡땡이 치고 극장 가겠다고 나온 녀석들은 나를 앞장세워 광복동 현대극장 앞으로 갔다. 극장 표 받는 아저씨들은 거의 친척이었고 나는 현대극장 사장 아들이었다. "아이구 왕자님, 오늘도 공짜손님 모시고 왔군요. 자 빨리들 들어가세요." 무조건 통과다.
60년대 소도시에서 술도가 집, 방앗간 집만 해도 부잣집이었고 극장 사장 집이면 그야말로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시 현대극장은 서울의 대한극장과 맞먹는 4층 규모로 부산의 명물이었다. TV도 없었던 시대라 최고의 놀이문화가 영화 관람이었다.
자! 다시 이야기를 계속하자. 점심 시간에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악동들을 극장에 입장시킨 후 나는 다시 오후 수업에 들어갔다. 수업 종료 종이 울리면 교문 입구에는 20명 정도의 아이들이 또 나를 기다린다. 당시 인기 있었던 영화는 '셰인' '노틀담의 꼽추' '상과 하' 'OK 목장의 결투' 등이었다.
영화 관람 후 밤 11시경 집에 돌아오면 30∼40명의 손전등 부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네 중고생 형들이었다. 그때부터 이 소대원들을 모아서 다시 현대극장으로 쳐들어갔다.
공부도 안하고 밤 늦게 들어오면서 아무 말도 없자―극장 갔다 왔다는 말은 비밀에 붙이기로 친구들과 약속을 했다―어머니는 "차라리 내가 맞겠다"고 하시며 당신의 종아리를 피가 나도록 때리셨다. 나도 울면서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했지만 악동들 극장 안내는 매일 되풀이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이 나를 앞세워 공짜로 영화를 감상했다는 것은 핑계인 것 같다. 나도 영화광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76년 TBC(동양방송) 드라마 PD로 입사한 동기가 됐다.
40명은 마지막 상영이 끝나면 1층과 2층 관람석 제일 앞줄에 20명씩 좌우로 정열한 상태에서 손전등으로 바닥을 일제히 훑어나간다. 이쪽저쪽에서 보물을 건졌다는 외침이 들려온다. "와! 오리온 카라멜이다." 씹다가 의자 밑에 붙여놓은 껌―당시에는 남이 씹던 껌도 씹었다―이나 떨어진 동전, 운이 좋으면 지갑을 주워 횡재하는 악동도 있었다. 부잣집 아이나 가난한 집 아이 할 것 없이 악동들은 현대극장과 그렇게 어울렸다.
악동들 대부분은 지금 영화감독, 극장 사장 등을 하고 있다. 요즘도 영화 '시네마 천국'을 보면 그 시절이 떠오른다.
이근용/SBS 심의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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