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뇌리에 남을 운명의 빗소리를 들었다. '동양의 입센'으로 불리는 중국 작가 차오위(曹禹·1910∼1996)의 24세 때 데뷔작 '뇌우'(연출 이윤택·사진)는 벼락처럼 무대를 덮쳤다. 관객은 그리스 비극을 연상케 하는 거센 운명의 격랑과 마주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알고 보니 배다른 오빠라면? 낳자마자 헤어진 자식과 자신의 딸이 연인이라면?무려 4시간30분의 공연시간이었지만 극은 숨가쁘게 치달았다. 그림자를 강조한 조명은 어두운 인간의 내면을 줄곧 비추는 듯했다. 검푸른 하늘을 향해 솟은 전신주, 높다란 대문과 경사진 무대 등 현대적으로 처리한 무대에는 천둥, 번개를 동반한 세찬 빗줄기가 쏟아졌다. 무대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빗속을 뒹굴며 배우들은 자신의 가혹한 운명을 거부했다. 관객은 광산자본가인 주복원(권성덕) 가문과 주씨의 하인 노귀(오영수) 집안의 뒤엉킨 애증의 실타래가 어떻게 풀릴지 조마조마하게 지켜보았다.
가혹한 운명의 '뇌우'를 몰아치게 한 것은 주복원의 악행. 여자들을 유혹하고 버리는 파렴치한이면서도 권위적이고, 이중적인 태도로 집안을 억누른다. 새어머니를 유혹했다가 버리고 하녀 노사봉(곽명화)과 도망가려는 주복원의 큰아들 평(서상원), 딸 사봉에게 노름빚을 뜯어내는 노귀 역시 여인들이 겪는 불행에 한 몫 한다.
남자들이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외면한다면, 여성들은 자신의 운명을 용기 있게 감당한다. 주씨 부인 주번의(이혜경), 노귀의 아내인 시평(권복순), 노귀의 딸 노사봉(곽명화)의 연기는 퍼붓는 빗줄기처럼 마음을 때렸다. 세 여배우와 더불어 대사의 호흡을 완벽하게 장악하며 극에 유머와 온기를 입힌 오영수의 연기는 독보적인 것이었다. 때때로 강한 빗줄기에 배우들의 목소리가 파묻히기도 했지만, 배우들은 전라로 무대를 누비는 등 혼신을 다했다.
휴식시간에 나눠주는 김밥과 국수로 극장은 잔치분위기를 자아냈다. 극을 보기 위해 부산에서 올라온 부산시립극단 예술감독 전성환씨는 "오랜만에 리얼리즘 연기의 맥을 잇는 공연을 보았다.
배우들의 발성과 화법이 정확했다"면서 "공연 중간 쉬는 시간에 먹는 국수 맛도 괜찮더라"고 말했다. 7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이종도기자 ecr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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