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미국 대선에서는 30년 전 베트남 전쟁이 새삼 이슈가 됐다. 민주당 존 케리 후보는 참전과 반전 경력을 함께 내세우며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정책을 비판했다. 베트남전 때처럼 군부도 회의론이 많은 이라크 점령을 강행한 것을 공격하면서, 역풍을 막기위해 참전 경력을 방패 삼은 것이다. 이에 맞서 부시 측은 케리를 국가에 불충한 극단주의자로 몰았다. 국가적 자존을 허문 베트남전을 거꾸로 정의로운 애국 전쟁으로 미화한 것이다. 베트남전과 이라크 개입까지 정당화, 케리의 도전을 뿌리치려는 책략이었다.결국 베트남전은 이라크 정책의 진짜 쟁점을 흐리는 위장 쟁점이다. 부시는 이를 통해 지지를 되찾았지만, 객관적 평가자들은 역사 왜곡을 비판한다. 역사가 부도덕한 전쟁으로 기록한 베트남 개입을 허황된 신화로 포장하는 것은 죄악이라는 것이다. 나이 든 세대가 떨치지 못한 베트남의 고통스런 기억을 모욕한 때문만이 아니다. 다음 세대 또한 이라크를 참담한 추억으로 되새기게 할 것이 더 큰 죄악이라는 경고다.
난삽한 미국 선거 얘기를 앞세운 이유는 우리 총선도 국가적 이슈를 흐리는 과거 회귀, 퇴영적 논쟁으로 치닫는 때문이다. 여야 모두 미국의 경우보다 현실이나 앞날의 비전과 동떨어진 명분 다툼에 매달리는 행태가 한심한 것이다. 최근의 상징적 행태는 김근태 열린우리당 원내대표가 인천 앞 바다 실미도까지 찾아가 내놓은 발언과 그 속내다.
그는 박정희 정권의 인권유린에 대한 입장을 밝히라며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를 걸고 들어갔다. 소식을 전한 인터넷 언론 사이트는 거친 찬반논쟁으로 어지러웠지만, 이라크 파병과 연좌제를 언급한 글들이 눈에 띄었다. 수십 년 전 순진한 청년들이 희생된 진상을 규명하자면서, 지금 당장 젊은 장병의 목숨이 걸린 이라크 파병에는 왜 침묵하느냐고 묻고 있었다. 또 과거 독재의 과오를 박근혜와 연결짓는다면, 형제가 월북한 김근태야말로 연좌제를 적용해야 하지 않겠냐고 되묻는다.
거친 사이버 논쟁을 소개한 것은 아무리 선거용이지만 조야(粗野)하기는 마찬가지인 김 대표의 언행이 젊은 세대의 역사와 현실 인식을 그릇 인도하기 때문이다. 반공이 모든 가치를 억누른 역사적 현실을 영화를 통해서나 경험하는 세대를 노린 도덕성 다툼에 32년 전 비극을 이용한 그에 비해, 이라크 파병의 배덕(背德)을 일깨운 사이버 논객의 안목이 돋보인다. 여느 열린우리당 인사와 달리 사리분별이 반듯하고 진중한 이가 스스로 혐오할 색깔론을 닮은 네거티브 공세에 앞장 선 것은 그만큼 위선적이다.
이번 총선은 민주와 반민주의 대결이란 구호를 되뇔 것이다. 박근혜 효과를 떠받치는 박정희 향수가 독재 망령을 되살린다고 외칠 것이다. 그러나 민주와 반민주 규정부터 시대착오적이다. 박정희 향수도 그의 성취에 대한 추억일 뿐, 독재 과오나 망령과는 상관없다.
양심적 정치인이라는 김 대표가 순진한 청년 30여명의 인권 유린에 진정 분노한다면 애국적 장병 5,000여명과 그 몇 십, 몇 백배 베트남인의 희생을 강요한 베트남 파병부터 비난해야 한다. 그 역사적 과오를 노무현 정부가 이라크에서 되풀이하려는 것부터 규탄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그는 베트남과 실미도 시절 우리의 처지가 지금과 비할 수 없이 각박했다는 역사적 현실은 외면한 채, 몇 십년 전 기준으로 자신들의 도덕적 우위를 자랑하는 셈이다. 베트남 참전보다 이라크 파병이 훨씬 부도덕한 이유를 그는 모르는 듯 하다.
자신들의 일은 무엇하나 제대로 못하면서 노상 과거 탓만 하는 것은, 키만 훌쩍 큰 20·30대가 60·70대 부모의 키 작은 것을 흉보며 우쭐대는 꼴이다. 그 미디어 시대, 인터넷 시대의 윤리에 마냥 의탁하는 모습은 보기 민망하다. 김 대표와 그 동지들은 여론의 눈에 비치는 자신들이 다 고만고만하게 키가 작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강병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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