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가 끝나고 술자리에서 나온 이야기 한 토막. K는 헌책방에 갔다가 정년퇴직한 지 얼마 안된 모 교수의 책이 무더기로 쌓여 있는 모습을 보고는 씁쓸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 책들 가운데는 현직 교수들이 정성껏 증정 서명을 해서 보낸 책도 있었다고 하니, 보낸 사람이 들으면 더 씁쓸할 이야기다.사실 우리나라에서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장서가가 된다. 장서가가 되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쉽게 이용할만한 도서관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다가 보면 어느새 책을 둘 곳이 없을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맘때쯤이면 대개 정년에 이르게 되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대학도서관이 '○○장서' 이름으로 책을 받아주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요즘은 대학도서관에도 책이 넘치고 공간이 부족해 기증을 마다한다. 행여 인문학을 하는 자식이 그 책을 다시 사용해 주면 좋겠지만 그렇지도 못할 경우, 필경 헌책방 운명을 피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생각해 보라. 공들여 써낸 첫 저서를 떨리는 손으로 서명해 선배 학자에게 보냈는데 어느 날 문득 헌책방에서 그 책을 만났을 때 어떤 기분일지.
술김에 동석한 젊은 연구자들에게 나는 이런 제안을 했다. 우리라도 나서서 전문도서관을 만들자. 정년퇴직하는 분들의 책을 기증 받아 한국문학 각 분야의 전문도서관을 만들고, 연구자나 일반인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자. 그게 우리가 기증한 책들이 헌책방에서 매매되는 모욕을 피하는 길이다.
그럼 공간도 필요하고 사서도 있어야 할 텐데, 그 돈은 어디서 나오죠? 금방 예상된 반문이 돌아왔다. 그게 문제라고 술잔을 부딪치면서도 나는 속으로 이런 몽상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기증한 책이 꽂힌 도서관에서 생의 마지막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노학자의 아름다운 모습을.
조현설/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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