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적십자는 참으로 많은 일을 했다. 1950, 60년대에는 농촌 봉사활동이 가장 많았다. 여름, 겨울방학이면 최대 70개 팀이 전국 각지로 나갔다. 가정간호법, 공중위생법, 생활개선 상식과 교양, 가계부 작성요령 등을 가르쳤고 5·16 후에는 위생변소나 농로 건설, 우물파기, 협동조합 결성 등 새마을 운동과 비슷한 활동을 했다.63년에는 '스승의 날'을 정해 각 학교에서 지키게 했다. 윤석중(尹石重) 작사, 김대현(金大賢) 작곡의 '스승의 날 노래'를 만들어 청소년적십자 단원들이 불렀으며 선생님에게 카네이션을 꽂아 드리는 운동도 했다. 10년 후 문교부에서 이를 확대, 모든 학생들이 기념하도록 했다.
우리 청소년적십자의 활동은 국제적십자사연맹에도 널리 알려졌다. 청소년부의 박윤호(朴允好) 차장은 영어, 일어, 중국어에 능통해 우리 활동을 많이 보고했다. 국제적십자사연맹의 킹슬리 시브라트남 아시아국장이 방한해 우리 활동을 살펴보고, 세계에서 제일 잘하는 나라라고 인정했다. 전쟁 후라는 특성에 맞춰 외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다양한 봉사 프로그램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64년 우리나라가 국제적십자사연맹의 청소년사업 자문위원국가가 됐다.
제네바의 국제적십자사연맹 본부에서는 매년 자문위원국 회의가 열렸다. 나는 영어가 대단히 부족해 첫 해에는 박 차장이 다녀왔다. 그 다음해인 66년에는 내가 한국 대표로 가게 되었다. 영어를 잘 못해 보고사항을 원고로 만들어 갔지만 걱정이 태산 같았다. 첫날 회의에는 원고를 그냥 읽기만 하면 돼 괜찮았다. 그러나 이튿날 회의부터 토론이 시작됐는데 나한테 질문이 쏟아졌고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아 진땀을 뺐다. 한 이틀간 잠을 못자고 셋째 날에 머리를 감으니 머리카락이 수북하게 떨어졌다. 그래서 한표욱(韓豹頊) 주 제네바 대사를 찾아가 최두선(崔斗善) 총재가 써준 서한을 내놓고 좀 도와달라고 했더니 마침 부인이 영어와 불어를 다 잘하는데 대사 부인이라 하지 말고 현지 거주 교포라고 하고 데리고 다니면서 활용하라고 했다. 참 고맙고 반가웠다. 그날부터 자문회의는 물론 총회에서까지 내가 한국말로 하면 한 대사 부인인 최정림(崔庭林) 여사가 통역을 해 회의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 때 내 나이 43세였지만 얼굴은 청년 같았다. 아마 각국 대표들 가운데 가장 젊었을 것이다. 어느 날 회의장에서 타이프라이터로 기록을 담당하고 있던, 영국에서 유학을 왔다는 젊은 아가씨 둘이 드라이브를 가자고 하는 것이었다. 나와 최 여사, 아가씨 둘 등 넷이서 하룻동안 구경을 갔다. 국경 너머 프랑스까지 갔다 왔는데 아마 몽블랑 아래 샤모네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풍경이 아름다웠다.
그 다음 날에는 그들이 자기네들 집으로 저녁 초대를 했다. 이번에는 나 혼자 갔다. 간단히 차려진 저녁을 먹은 후 레코드를 틀어놓더니 춤을 추자는 것이었다. 당황했다. 춤이라곤 포크댄스 외에 배운 적이 없었다. 자기네들이 리드를 하겠다고 해 춤을 추는 데 등에 땀이 나도록 힘들었다. 여독이 쌓여 피곤하니 다음에 다시 기회를 갖자고 하고 겨우 석방이 돼 호텔로 돌아왔다. 아가씨들은 김이 샜을 것이다. 내가 참 촌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희한한 일이 또 벌어졌다. 국제적십자사연맹 사람들이 영국과 독일에 견학 여행을 보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사무총장이 직접 최 총재에게 전화를 걸어 승낙을 받았다. 독일에서는 본의 독일적십자사, 뮌스터와 뒤셀도르프의 혈액원 및 청소년 활동 등을 견학했다. 한 지방 신문에서 인터뷰를 요청해와 서툰 영어로 몇 마디 했더니 그게 신문에 났다. 영국에서는 런던 적십자봉사원의 연수시설 등을 시찰했다. 거기서도 어느 신문과 인터뷰를 했다. 이번에는 기사와 함께 얼굴 사진까지 났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귀국해 최 총재와 김학묵(金學默) 사무총장에게 보고를 했더니 벙어리 같은 녀석을 보내놓고 걱정했는데 가는 데마다 환대 받고 신문 인터뷰까지 했다며 놀라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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